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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딩턴 May 01. 2024

기념품 모으지 않는 승무원

디즈니 핀만 200개 모았으면서 갑자기?


 22살, 미국 디즈니월드에서 일하던 때였다.

귀엽고 깜찍한 장난감들이 가득한 디즈니월드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조그맣고 반짝거리는 핀뱃지였다. 디즈니의 온갖 캐릭터부터 마녀의 신발, 공주의 머리띠 같은 자잘한 소품까지 핀뱃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금껏 몰랐던 핀 콜렉터의 세계는 정말 넓어서, 희귀한 디즈니 핀만을 수십 년간 모아 온 사람도 있었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주문을 받아 핀을 대리구매하는 판매업자도 있었다. 광적인 콜렉터들을 위해 은밀하게 발매되는 특별한 핀들도 있었으니, 그런 핀들은 매장 진열도 하지 않고 직원에게 따로 문의하는 손님에게만 슬쩍 꺼내다 주는 식으로 판매됐다.

또, 디즈니에는 ‘핀 트레이딩’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모든 디즈니 직원들은 목걸이나 허리춤에 10개가 넘는 핀을 차고 다니며 손님이 본인이 가진 핀과 트레이딩을 요청하면 핀을 바꿔준다. 이 덕에 직원으로서 언제나 10개가 넘는 핀을 받아 목에 걸고 다니곤 했으니, 그중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슬쩍 챙겨두곤 했었다. 핀을 모으기에 너무 좋은 환경인 것이다.

그렇게 난 200개가 넘는 핀을 모아 한국에 돌아왔다.



디즈니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지 5년이 넘은 지금,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내가 모은 수많은 핀을 꽂아둔 핀보드는 여전히 내게 보물 1호다. 하지만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그 보드를 볼 때마다, 저 핀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아는 것은 나뿐, 저걸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나뿐, 내가 아주 나중에 죽게 되면 저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곤 했다. 할머니가 소중하게 여기시던 거야~ 하면서 내 손자들에게까지 저걸 평생 이고 지고 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살아가다가 그 보드를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평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물건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인지 전 세계를 여행하는 승무원이 된 지금, 난 그 흔한 마그넷조차 모으고 있지 않다. 룸메이트의 냉장고에 붙어있는 마그넷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보아도 더 이상은 뭔갈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예쁘기만 하고 실용성은 없는 무언갈 모으는 것은 디즈니 핀으로서 끝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게 내가 블로그와 브런치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다. 평생 소중하게 관리해야 하는 유형의 무언가 대신, 글이나 사진을 모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핀뱃지처럼 반짝거리고 알록달록하진 않지만, 십 년 후에는 기억나지 않을 나의 감정과 기억을 담아둘 수 있으니 그 장점을 잘 활용해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디즈니에서 주급을 모아 열심히 핀뱃지를 사모은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의 젊었을 때를 예쁜 핀뱃지와 일기로 기억할 생각을 하면 그저 뿌듯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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