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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Apr 26. 2024

4월 수박은 부르주아의 맛

 "이번 달 카드비가 N백만 원 나왔어."


 창고형 마트를 다녀온 날엔  저렇게 물어본 적 없는 피드백이 온다. 5인 가족 먹고살려면 대형마트를 다녀와도 틈틈이 장을 보기야 하지만 애초에 터무니없는 소비를 두려워하는 주부다. 한 달 만에 찾은 코스트코에서 20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을 결제했는데 저럴 일인가.


 3남매의 간식 초이스가 달달이에서 든든이의 것으로 옮겨감에 따라 에미는 선택형 수전증에 걸렸다. 카드를 내미는 손도 떨리지만 가격표를 볼 때마다, 결제를 할 때마다 심장도 두근두근, 침이 바짝. 카드의 마그네틱을 슥삭 긁는 일직선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교감신경도 쫙쫙 퍼진다.

 

 장바구니 해체를 하며 다시 확인한다. 충동을 구매한 것인지. 영수증을 확인하며 마지막 검사를 한다. 사치를 구매한 것인지. 지지리 궁상아, 그거 확인한다고 뭐 나오겠니, 그냥 고기 사고 과일 사고 우유랑 계란에 애들 간식밖에 없는데. 하필 핑곗거리 삼기 딱 좋은 품목이 있다면, 수박. 올해 처음 만나는 4월의 수박이다.


 슬슬 수박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금덩이 값이다. 5킬로짜리가 2만 원을 훌쩍 넘고 7~8킬로 하는 것들은 4만 원이 우습다. 그런 와중에 5킬로 17000원대 수박을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아니한가. 수박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둘째 녀석 덕분에 11월에도 수박을 사 본 적이 있는 엄마로서 5킬로 17000원쯤이야. 같이 간 마트 멤버와 반통 나누기로 했으니  따지자면 2.5킬로 8500원.


 집으로 돌아와 겉을 부드러운 수세미로 문질러 씻어낸다. 초록과 검정이 자리싸움을 한 듯 거칠게 내려가는 줄무늬가 선명한 걸 보니 수박은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낸 것이 분명하다. 7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수박은, 비닐이 싸맨 하우스 안의 열기도 볕이라고 충실히 모아들였나 보다. 꽃망울 떨어진 자리 구슬 같은 알맹이로 시작하여, 붉은 과육이 몸집을 부풀리는 동안 껍질은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둥글둥글 모양을 잡고 팽창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농부의 수고와 주위의 열을 힘써 끌어당겨 놓았을 것이다.


 껍질을 다 썰어내고 나니 1.2킬로쯤 양이 남는다. 한 조각 먼저 맛을 보니 작열하는 태양빛을 받아낸 덩치들과 비교하긴 뭣해도 물기 가득 머금어 시원하고 적당히 달달하다. 그래, 수박은 이 맛이지. 딸기 500그람에 5000원 시세를 셈하면 비싼 과일은 아니라고 혼자 뿌듯해하고 있는데 어머님의 아들이 다시금 찬물을 끼얹는다.


 "4월에 수박을 먹어? 부르주아네 부르주아야."


 오백 그람당 오천 원이 어쩌고 계산이 어쩌고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어차피 내 입으로 몇 조각 들어가지도 못할 수박을 가지런히 썰던 주부가 달을 잘못 만난 죄로 된장녀가 되어버렸다. 별로 비싼 가격이 아니었다 얘기해도 '수박이 싸 봤자'라는 눈빛이다. 칼질을 썰며 셈했던 두뇌 속 계산기를 꺼내어 보여주고 싶다. 일장연설 가능하지만 구차하다.

 그냥 곱게 썰어줄 때 곱게 드시기나 하시지?

 마누라가 눈으로 핵을 쏘든 말든 그도 어쩔 수 없는 수박의 노예다. 부르주아의 맛이라더니 마냥 시원하게 꿀떡꿀떡 잘 넘기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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