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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02. 2020

내가 언제 수학경시 나가라고 하든?

기브온이 알려준 포도주 부대

이스라엘 백성은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민족인데 여리고성에 이어 아이성까지 함락했어요. 이 소식을 듣고 주변 국가들은 전열을 다듬어 전쟁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히위 사람인 기브온 주민들은 여호수아를 속이기로 해요. 어떻게 속이는지 볼까요.(여호수아 9장 1절-23절)     


그들은 낡은 부대와 헤지고 터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서, 외모를 사절단처럼 꾸미고 길을 떠났다.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몸에는 낡은 옷을 걸쳤으며 마르고 곰팡이 난 빵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습니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어주십시오”     


여호수아는 의심합니다. 당신들은 이 근처 사는 듯하다고. 우린 이 근처를 다 정복할 계획인데 당신들과 조약을 맺으면 우리의 계획, 즉 신의 계획과 어긋난다고. 그러자 기브온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지요.      


우리가 가져온 이 빵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빵을 쌀 때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나 지금은 마르고 곰팡이가 났습니다.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부대도, 옷과 신발도 먼 길을 오는 동안 낡아서 해어졌습니다.      


그들의 행색을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여호수아는 조약을 맺어요. 얼마 후 그들이 가까이 사는 이웃, 즉 정복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죠. 그러나 이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조약이라서 깰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는 약속대로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하지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주변 국가에서 기브온을 괘씸죄로 공격했을 때 여호수아가 나서서 지켰어요. 기브온이 선택한 거짓말은 결국 그들 지파를 살렸습니다.    

  



저는 여전히 방학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입니다. 방학은 자고로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고 다음 학기를 어느 정도 선행해줘야 하지요.


듣기만 해도 아름다운 이런 방학은 아쉽게도 엄마에게만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11살이 된 꼬마는 늦잠 실컷 잔 후 빈둥거리다가 박이 장에 매달려보는 그런 방학이 아름답습니다. 왜 꼭 저렇게 기이한 자세로 놀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집주인에게 행여 흠 잡힐까 봐 얼른 내려오게 했습니다.

   

선행은 바라지도 않고, 이번 학기 복습이나 좀 잘해줬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두 달 후면 4학년 될 애가 3학년 1단원 수학 단원평가에서 반타작이 나옵니다. 그래 놓고 구구단이 나온다고 온갖 짜증을 부리네요? (참고로 구구단은 2학년 때 합니다) 저 맥락 없는 짜증을 받고 있자니 저도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대차게 잡고 한 판 뜰 기세에 기브온이 저를 막습니다.      


기브온은 분명 거짓말을 했어요. 그것도 간 크게 신의 계획에 위배되는 거짓말이었죠. 그런데 그 거짓말 하나 하려고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빵, 포도주 담는 부대, 신발, 옷 등 모든 상황을 여호수아가 속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지요. 물론 거짓말을 한 대가로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없지만 그 주변 지파들이 다 정복되어 목숨을 잃을 때 무사히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요.(여호수아 9장 27절)


저도 그렇더라고요.


제가 이 꼬맹이랑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수학경시 나가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저 이미 지난 학기에서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 파악하고 그걸 살살 메꿔주면 되는 겁니다. 거창한 미적분이면 말없이 돈으로 선생님을 찾아야겠지만 이건 그냥 단순 곱셈이거든요. 저도 곰팡이 난 빵과 낡은 포도주 부대, 낡은 신발과 옷을 준비해서 아이를 감쪽같이 속여야 합니다.     

 

“우리 스피드 게임할래?”

“(이미 짜증 난 상태라 대답도 거칠게 나옵니다) 갑자기 무슨 게임이래”

(절대로 동요하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 낡은 포도주 부대이고 다 헤진 신발입니다) 아잉, 엄마 심심해서 그래”

“수학으로 할 거잖아”

“엄훠, 울 딸이 이르케 똑똑해요. 엄마가 말 안 해도 막 마음을 아네?”


애가 배시시 웃습니다. 오예,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자, 한다? 팔일은?”

“팔”

“오홍, 이기기 쉽지 않겠어. 팔이?”

“십육”

“팔오?”

“아, 뭐야. 순서 지켜야지.”

“엥, 그러네. 엄마가 순서 어겼네. 그럼 1:0”

“뭐야? 내가 1이야?”

“어, 엄마가 순서 못 지켰잖아”     


엄마가 확실히 깔아주니 아이는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8단과 9단을 연습하고 문제를 풉니다. 물론 푸는 중간중간에 드러눕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으나


기브온의 목표가 그저 ‘죽지 않는다’ 였듯이 제 목표도 ‘이 한 장을 끝낸다’로 단순화합니다.


끝내기만 한다면 드러누워 하든, 물구나무서기로 하든 상관없습니다. 제 포도주 부대와 낡은 신발은 오로지 이 하나만을 위해 열심히 제 일을 합니다.      


드디어 끝났습니다. 기브온 지파는 살아남았고 저도 금쪽같은 내 새끼랑 싸우지 않았습니다. 제 속은 어떻냐고 물어봐 주세요. 아직 수련이 덜 된지라 보람보다는 삭힌 화로 피곤함이 앞섭니다. 찐하게 카페인 보충을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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