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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May 14. 2024

외로움과 지루함에서  도망칠 수 없는 직업

읽고 쓰다

나는 30대부터 줄곧 한 가지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인생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감정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다.  


흔히 극복하고 누그러뜨려야 할 감정으로 분노나 질투, 증오를 꼽는다. 그러나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감정은 그와 같은 역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치명적으로 위험한 감정은 단 두 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외로움'과 '지루함'이다. 겉보기에는 증오와 질투, 분노로 이루어진 사건도 투시하여 잘 들여다 보면 외로움과 지루함이 주춧돌과 기둥이 되어 떡 버티고 있다.


예를 들면 아주 오래 전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 외진 산골짜기에 살던 두 할아버지가 있었다. 너무 외진 곳이라 이웃이라곤 둘뿐이었다. 두 할아버지는 만날 친구가 서로뿐이었다. 집이 가깝지는 않았으나 일부러 찾아가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막걸리를 마시던 두 사람은 싸움을 했다. 놀러왔던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집으로 갔다. 이곳에 놀러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20~30분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물건 하나를 챙긴 다음 다시 길을 되짚어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 가져온 것은 총이었다. 깊은 산 속에 살던 두 사람은 산짐승 퇴치용 공기총을 구비해두고 살았다. 그는 돌아와 단 하나뿐인 이웃이었던 할아버지를 쏴 죽였다. 20~30분 시간을 들여 수고스럽게 총까지 가져와 살인을 한 덕분에 '화'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라는 그 할아버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문에 무거운 형량을 언도 받았다.


이 사건의 표면은 마치 분노와 증오, 질투(싸운 이유는 잘 모르지만, 자존심을 건드린 뭔가가 있었겠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번 근원적인 질문을 해 보자. 외진 산골짜기에 들어가 혼자 살 정도로 사교성이 좋지 않은 두 남자가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20~30분 거리에도 불구하고 만나서 술을 먹었을까? 애초에 안 만나고 살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럴 수는 없다.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모를까 20~30분 거리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인간은 무너진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외로움과 지루함이라는 유전인자가 기본 탑재된 채 생산되는 까닭이다. 그 둘을 극복하면 인간사의 모든 슬픈 일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지만, 그걸 극복했다는 인간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죽기 전에 디너 파티를 했고(그 파티를 두고 '최후의 만찬'이라 부른다.), 석가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해놓고 자기 아들까지 끌고 다니며 대면 설법에 힘썼다.


몇 달 전에는 바위 동굴 입구를 막아버리고 은둔하는 수도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 수도자를 찾아가면 실을 꼬아 만든 기도 팔찌를 준다고 했다. 괴이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야말로 사람은 지루함과 외로움을 평생 극복할 수 없다는 증거 같았다. 사람을 만나기 싫다고 굳이 바위 동굴에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혼자 어슬렁거리며 다니기 좋아하고 짝짓기 할 때가 아니면 동종은 만나기도 싫어하는 재규어나 표범을 생각해 보라. 짱 박혀 있는 것보다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편이 고독에 더 적합한 라이프 스타일이다. 게다가 빛도 들지 않는 그 동굴 안에서 하고 계신 일이란 것이 촉감만을 이용해 '선물용' 기도 팔찌를 제작하는 거라지 않나? 누가 올지, 누군가가 오긴 올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말이다.


어쩌면 그가 수고롭게 거기까지 간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동안은 누군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똥통을 가져가주고, 심지어 기도용 팔찌까지 감사히 받아가는 기이한 사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가 제의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교 세계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타협을 버린 외곬수 사교를 하자니 외로움과 지루함의 공격을 견뎌내야 했고, 결국 실을 꼬아서 팔찌를 만들며 벌레나 피부병보다 견디기 힘든 그 두 감정을 견뎌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커트 보니것의 졸업연설 모음집을 읽다가 나의 개똥철학과 같은 맥락의 글을 발견했다. 위대한 작가라서 그런지 나보다 훨씬 위트있게 주제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만 남았습니다. 바로 외로움과 지루함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남은 생애 동안 지루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친구와 친척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안정적이고 생각이 비슷한 오십 명 이상의 대가족 내에서 살아야 합니다. (중략)
그래서 저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온갖 조직에 가입하기를 권합니다. 그 조직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더라도 말입니다. 핵심은 여러분의 삶에 더 많은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 조직의 구성원들 가운데 상당수 혹은 전부가 멍청이일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겐 어떤 친척이든 수를 늘리는 게 필요하니까요.
이제 지루함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우리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지루함은 삶의 일부입니다. 그걸 견디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제가 이 졸업반에 속해 있다고 선언한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여성과 남성 말이죠. (pp.33-34)


그렇다. 지루함과 외로움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숙명적인 감정이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외로움 DNA는 50명 이상의 집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고(그보다 적으면 생존 위협을 느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둘에서 넷 사이의 인원으로 된 생활공동체를 기본으로 설계되어 있다(때로는 '개인'이라 불리는 1인 생활 단위를 기본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외로움과 지루함을 잘 견뎌낸 사람들이다. 그 감정들을 얼마나 잘 견디고 잘 이용하느냐가 인생 전체 여정의 실패와 성공을 결정 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혹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서 도피성 사교와 타협을 계속할수록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사교와 타협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대개는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그저 혼자 있는 느낌과 지루함이 싫어서, 혹은 그런 느낌이 들 때 뭘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거나 집단적 독백을 하는 술자리를 가진다.


또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작은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지루함과 외로움을 덜어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통상적으로 그런 행위를 업무상의 접대라고 부른다.  


요즘은 SNS와 종이책 이외의 정보 매체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발달했는데, 그 발달에 기여한 것도 인간의 본원적 감정 두 가지와 그를 회피하려는 성향이다. 모든 매체의 역할은 결국 하나다. 혼자된 느낌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을 없애주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내 글을 교정교열한 파일을 받아들고 생각에 잠겼다. 교정지에는 내가 구어성 짙게 쓴 문장을 통째로 수정해 버린 교정 제안이 있었다. 한때 나도 편집자로 재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교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이 아닌 교실에서는 원칙만을 가르친다. 원칙에만 충실하면 그 문장이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장 경력은 원칙 밖에서 처리되는 수많은 예외와 제외를 익혀나가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 문장을 보며 교정자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교정자는 이 일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인 듯했다.


나는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에 앞서 '작가의 개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문법을 모르는 상태로 작성된 문장은 형편없다. 그러나 대개의 구어들은 일부러 문법을 약간 무시하면서 리듬을 추구한다.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단 한 문장으로도 충분할 말을 여러 문장으로 늘리고 일부러 중언부언하기도 한다. 그런 문장이 독특한 느낌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교정지에 몇 줄의 반박을 적어 보내며 나는 내가 바위 동굴의 수도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 내가 있고,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는데, 그걸 고치면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당신들의 룰은 알지만 나는 타협할 수가 없소.


작가의 고충 중에 하나는 때로 일부러 외로움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물리적인 시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물리적인 시간으로도 외로움은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야 글을 쓰니까. 그런데 정신적으로도 외로움을 자초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때로는 그 사실이 물리적으로 외로운 시간보다 더 힘들다.


사교의 필수 요소는 타협이다. 만남 중에는 상대와 내가 가진 세계관의 룰이 끊임없이 타협을 한다. 사회의 통념과 내 개인적 신념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져야 사교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만남 중에는 정신적으로 피곤한 줄타기가 계속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들이 충돌하는 것인지, 사회적 통념과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인지 눈치 빠르게 파악한 뒤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타협을 상대에 대한 존중의 형태로 표현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작가가 세계(독자)와 직접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작가들은 매우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존재 이유를 인정받는다. 세계의 눈치를 살펴 자기 형태를 결정하는 작가는 영원한 이류가 된다. 세계의 눈치를 살피는 일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그들을 세계와 연결해 주는 것은 출판 편집자, 플랫폼의 편집자, 서점 마케팅 담당자들이다. 그들은 지금의 세계가 원하고 있는 것을 가장 기민하고 예민하게 살피는 사람들이다.


한때 나도 편집자로서의 미래를 꿈꿀 때가 있었다. 그때 내가 가장 성실히 했던 일은 시장 조사였다. 서점 매대, 온라인 서점의 메인 화면을 수시로 살피고 블로그의 서평들도 꼼꼼히 관찰했다. 그에 비해 작가들은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쓰는 속도와 세계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써둔 글들이 세계와 만날 예정이므로 더욱 다양하고 더욱 개성적인 작가들이 세상에는 필요하다. 아니라면 이 세상에 이토록 많은 작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비비언 고닉은 <상황과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어떤 글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은, 글을 읽는 시점에 필요한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중략) 사랑이나 정치 혹은 우정에서도 그렇듯,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어떤 가치 있는 작품이 출간 이후 맹비난을 받거나, 잠깐 반짝하고 사라질 작품이 극찬을 받는 이유는 읽는 사람들의 잘잘못 때문이 아니라, 때를 잘 만났거나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거나 훌륭해도 당장은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기에 돌처럼 가라앉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단명할 것이 뻔한데도 지금, 바로 지금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호평을 받는 책도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면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얻어야 비로소 풍요로워진다.
내가 쓴 글을 훑어보면 심각한 편파성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내가 읽은 책들과 읽은 방식에도 그런 편파성이 반영되어 있다. (중략)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편협하면서도 명확한 필요에 따라 글을 읽음으로써 글 쓰는 법을, 그리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pp.188-190.)


모범적 글쓰기란 정형화가 아니라 그 반대이다. 편협하고 독특한 시각을 가진 글이다.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는 개성적인 글은 그 분야의 모범이 된다. 그러한 글에서 본받아야 할 점은 그 작품 자체의 형태가 아니다. 그건 남의 뜨게질 작품을 그대로 흉내내 뜨게질을 하는 일에 불과하다.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스웨터를 떴다는 그 사실이 바로 모범이다. 능숙하게 코를 거는 기술을 기반으로 나만의 스웨터를, 혹은 스웨터도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을 떠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가내수공업은 예술이 된다.


그 과정에서 편협해지는 것, 외로워지는 일은 피할 수가 없다. 훌훌 다 털어 버리고 멀리 여행이나 다녀왔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건 일상의 지루함에서 도망치려는 미성숙한 심리이겠지.


이런 글을 쓰고 있기에는 바깥 날씨가 너무 좋다. 치명적인 유혹이다.



커트 보니것, 김용욱 옮김, 『그래, 이맛에 사는 거지』, 문학동네, 2017.

비비언 고닉, 이영아 옮김, 『상황과 이야기』, 마농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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