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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08. 2023

1막 1장. 한 여자

금요일마다 연재할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실존하는 이들이기에 대부분 가명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런 소릴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꺼?"


"아니예... 처음 들어봅니더"


제법 불룩해진 그녀의 아랫배 위에서 천천히 손목을 움직이던 의사가 한 지점에 멈춰 서며 묻는다. 

'쿵쿵 쿵쿵 쌕쌕 쌕쌕' 생전 처음 듣는 빠르고 큰 소리가 작은 검사실 안을 가득 메우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것과 비슷한 소릴 들어본 일은 없다. 


"정말 축하드립니더!!! 이 소리가 뱃속 애기 심장 소리 아입니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네예... 

와!!! 우리 병원에서 마흔두 살에 첫 임신을 하신 분은 처음 봅니더!!!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몸관리 잘하시고 두 달 후에 제왕절개로 출산하면 될 것 같습니더!!!"


'임신이라고????..... 불임판정을 받았던 내가?... 결혼 생활 17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억울하게 이혼까지 당했던 내가 상상조차도 못한 임신이라니...'

 

그녀 자신보다 더욱 격양된 소리로 기뻐하는 의사의 말에도 그녀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당장 그를 만나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해 이혼까지 당했던 내 뱃속에 당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체할 수 없이 기쁜 감정에 도취된 그녀와는 반대로 그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사춘기에 이르는 자녀들 넷과 부인이 멀쩡히 함께 살고 있는 그의 가정과 사회적 지위가 뿌리째 흔들릴 위기에 놓인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절대 아이를 출산해서는 안된다며 필사적으로 반대한다.

지금 당장 낳아도 거의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을 아이를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수술 날짜를 잡자는 것이 그가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때는 아직 해방이 되려면 십 년 세월이나 꼬박 기다려야 하는 일제강점기였다.

당시 기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다섯 살에 여의고 열일곱이 되던 해 2월, 어머니마저 잃게 된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그나마 남아계신 친할머니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했다.

대학에 가는 일이 그리 흔치 않던 시절, 교육열 강한 어머님의 유언으로 세 살 터울 오빠가 돈을 벌어 자신과 여동생의 학비를 힘겹게 마련해 봤지만 전쟁이 막 끝난 보잘것없던 시대에 갓스물 넘긴 남자가 학교를 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선지 그녀는 끝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스무 살이 넘기도 전에 이미 혼처가 정해지던 시절이었지만 부모가 없으니 서로 좋아 지내는 사람이 있어도 선뜻 혼사를 이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이십 대 중반의 노처녀로 지내던 중 지역 신문 기자로 일하는 나이차가 적잖은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로 혼사 이야기가 오갈 때쯤, 보다 못한 이웃이 그 남자는 이미 유부남이라는 믿지 못할 귀띔을 해 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남자를 추궁하니 아닌 게 아니라 실은 부모님이 자기도 원치 않는 혼처를 정해 놓은 탓에 억지 결혼을 하여 둘 사이에 일남일녀의 자식만 낳고 서로 헤어졌단다.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몸져 앓아누우며 남자를 끊어내기로 했지만 마음 가득 품고 있던 그를 떨쳐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는지 졸지에 세 살 여자 아이와, 한 살 사내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되어 가정을 꾸렸지만 정작 둘 사이에서는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방생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그녀는 거북을 사다 바닷가에 풀어놓았더란다.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세차게 헤엄쳐 가는 거북 한쌍을 바라보며 부디 아이 하나만 낳게 해 달라 애타게 빌었고, 사월 초파일이면 연등을 달고, 탑돌이를 하며 간절한 마음을 쏟아내었다.

자상한 남편과 정원 딸린 집을 짓고, 일 하는 사람을 두는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임신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번에는 찰떡같이 임신이겠지 싶어 병원에 찾아가면 상상임신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와 눈물을 흘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렇게 17년의 결혼 생활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생인 친구가 집으로 전화를 하여 이상한 소릴 한다.


"숙아.... 일단 마음 잘 추스르고 들어라...."


"무슨 얘긴데 딴 날 하고 다르게 와그라노?"


"있다 아이가..... 정기자가........ 다른 여자하고 살림을 차맀다 카드라"


"뭐라꼬? 니 지금 무슨 소리 하노? 그런 쓸데 읎는 소리는 오데서 들읐노?


"나도 이리 놀랬는데 니가 우찌 믿을 수 있겠노... 그래도 친군데 모른척하고 있을 수가 없다 아이가"


"니가 지금 무슨 말을 오데서 듣고 와가 이라는지는 몰라도 세상 남자가 다 바람을 피아도 이 사람만은 아이다.

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라카그등 고마 전화 끊으라"


"그래... 알았다. 내는 니가 걱정이 돼 가... 숙이 니가 오죽 잘하겠나..."


그날 저녁 퇴근을 한 남자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우물쭈물 당황하는 것이 못내 이상했지만 차마 그럴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느 날처럼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이른 저녁쯤 스무 살 초반이나 되어 보이는 앳된 여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이~가 정기자님 집이지예?"


"예.. 그런데 누구십니꺼?"


"이 집에 사모님 맞습니꺼?"


"예... 무슨 일로 왔습니꺼? 우리 남편은 어제 특근 한다고 나갔는데예?"


"아.... 그래예...."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예? 다음에 약속을 잡아가 다시 와야 될낀대예?"


".........사실은예..... 내하고 정기자하고 같이 살고 있습니더... 오늘 아침에도 우리 집에서 출근 했다 아입니꺼!"


"뭐라꼬??? 지금 이기 무슨 소리고?"


"옴마!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합니꺼! 이 여자 이거 내 학교 삼 년 선배라예. 간호원 아입니꺼"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열여덟 살 된 아들이 한 마디 거들었다.


" 여자 이거 미칬는갑다. 옴마 이 정신 나간 여자 쫓아내야 합니더!! 나가라 이~가 오데라꼬 와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씨부리쌓노"


아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여자를 끌어내려 하자


"현진아 내한테 이라몬 안된다. 내 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라 그라고 아줌마는 지금까지 아~도 못 낳는데 우리 정기자 인자 그만 놔 주는기 좋겠습니더!!!!"


"이기 지금 돌았나? 안나가나?"


함께 있던 딸과 아들이 막무가내로 들어오려는 여자를 밀쳐내자 중심을 잃고 넘어져 낮은 계단을 구르던 앳된 여자는 잔디밭에 나동그라진 채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다. 


"이라몬 안 된다... 이라몬 안돼... 내 뱃속에 느그 아버지 아~가 들었다!!!!'


'무슨 소릴 들었던가... 지금까지 어떤 노력으로도 갖지 못하는 남편의 아이를 저 어린 여자 애가 가졌다고???'


저녁 무렵 머쓱해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온 남자에게 사실 확인을 하자 그는 모든 것을 시인했고 그녀는 그의 눈알이 빠져라 뺨을 후려갈겼다.

그렇게도 자상했던 사람이... 결혼한 지 이십 년이 가까워오도록 매일밤 손깍지를 끼고 잠이 들던 그 사람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마다하지 않던 그 남자가 자식 나이의 어린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제 지난 모든 일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부동반 모임에 가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한 사람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호텔을 고갯짓 하며 얘기했다.


"저~ 매일같이 하루가 머다하고 가는 사람 있다 아이가"


"맞다. 어제는 미스김, 오늘은 미스박... 이 여자 저 여자 막 바까가 저~ 간다카대? 니도 소문 들었나?"


"하모 알지... 그 남자 마누라만 모르지 이 시내 바닥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오데 있노?"


알고 보니 그의 여성 편력은 히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 치부할 수밖에 없던 기막힌 시절이었으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듣고는 그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법적 절차가 허술했던 그 시대여서였을까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이혼녀가 되어 있었고, 그녀 몰래 집을 판 그 남자는 그것으로 위자료를 대신한다고 했다.

비록 돈은 손에 쥐었으나 그렇게도 믿고 사랑한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십수 년간 남의 피붙이를 둘이나 키우던 여자는 하루아침에 오갈 데가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도 친정 엄마도 없으니 결혼한 오빠를 찾아가자 집을 구해주며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십이 다 되도록 자식도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 같았던 그녀는 전 남편의 불륜 소식을 알려주었던 친구의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 카운터 일을 보는 친구와 사정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나마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제법 유명했던 그곳은 군인 간부들이 회식 장소로 자주 찾던 곳이었고, 마음 붙일 곳 없던 그녀는 자주 그 식당에 들르는 여덟 살 연상의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이 일 년쯤 되던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입맛이 도통 없는 데다 몸이 나른한 것이 속이 메스껍고 불편한 느낌이 몇 달째 계속되자 애도 못 낳는 몸인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그 해 겨울은 어찌나 춥던지 약을 먹어도 도통 낫지 않는 감기 탓에 처방전 없이 약사에게 약을 짓던 그 시절, 너무 추워 팔짱을 끼고선 약국에 찾아갔다.


"이번 겨울은 와이리 추운지 모르겠네예... 감기가 와이리 안 낫노.... 약을 쪼매 독하게 지아 주이소"


"그래예??... 혹시 애기 가진거 아입니꺼?"


"오데예... 세상 여자들은 다 임신을 해도 내는 절대로 임신을 하는 사람이라예... 아이구 이번 겨울은 와이리 춥노.. 춥어서 몬살긋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우찌 압니꺼.. 약은 내가 알아서 조제해가~ 드릴게예"


집에 돌아와서도 이상한 증상은 도통 가시지를 않았다.

간절히 먹고 싶었던 음식을 해 놓고도 밥상 앞에 앉으면 이내 속이 메스꺼워지니 꼭 아이를 가진 사람이 입덧하는 듯했지만 이전에도 이런 증상이 있어 병원에 가면 상상 임신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고 매달 있는 달거리는 처녀 적부터 석 달, 넉 달 띄엄띄엄 있어왔기에 그것이 임신 증상의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살이 찌면 온몸 전체가 다 쪄야 하는데 배만 자꾸 나온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걸까? 딱히 변의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듯 밤낮없이 꾸물거림이 느껴진다.

무서우리만치 짙푸른 남색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혼자 목욕을 한다던지 찰싹이는 에메랄드빛 초록바다, 가을하늘처럼 파란 맑은 바다를 매일밤 꿈속에서 보면서도 왜 이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또 어떤 날은 방 안으로 들어온 용이 눈에서 삼색 불빛을 강렬하게 쏟아내며 벽을 타고 다니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도 했다.  

매달 이상한 증상이 순서를 바꿔가며 되풀이되던 5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산부인과에 가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뱃속 아이가 이미 팔 개월이나 자라 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지난 몇십 년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 왔던 아이인가....

하지만 그녀 앞에 앉은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만은 절대 낳아서는 안된다며 입에 발린 소릴 하며 마음을 돌리려 회유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고난과 결과가 뒤따르더라도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출산을 극렬히 반대하는 그에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이별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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