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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Jul 02. 2015

나의 첫 번째 오름

Drawing Blue #02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중산간 지대를 넘어 마침내 이 노선의 종점인 성산포에 가까워졌다.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감았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30여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깊고 달콤한 낮잠을 잤다. 나른한 봄날의 햇살이 치명적이긴 했던 모양이다. 눈꺼풀에 매달려있는 잠의 흔적을 지워가며 성산포에서 201번 버스로 갈아탔다. 오늘 여행의 출발점인 시흥리로 가기 위해서였다.


성산포를 벗어난 버스는 제주시 방면으로 조용한 왕복 2차선의 도로를 달려갔다. 도로를 따라  듬성듬성 들어선 파랗고 빨간 낮은 지붕들이 천천히 다가왔다가 뒤로 사라졌다. 그 위로 푸르게 펼쳐진 제주의 하늘. 대단한 풍경이 펼쳐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혼자 조용히 설레었다. 멍하니 주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버스는 경쾌한 브레이크 파열음과 함께 시흥리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섰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탓에 허둥지둥 배낭을 챙겨 들었다. 짧은 머리에 파마를 곱게 하신 할머니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3월이라 목덜미에 와 닿는 바람은 조금 선득했지만, 고즈넉한 동네에 쏟아지는 햇살만큼은 몹시 따사로왔다.


올레 1코스의 시작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를 따라 시흥초등학교 방면으로 걸어가니 도로가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었을까. 멀리에서부터 그가 나를 예의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쭈뼛쭈뼛 다가서는 나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올레길 오신 거죠? 여기가 1코스 시작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모든 올레코스에는 '올레지기'가 있는데, 이 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올레길을 만들 때부터 참여했다는 이들은 이 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여행자에게 올레길을 안내하는 등 올레 운영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분 덕에 시작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올레 1코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해주셨는데, 구제역으로 인해 일부 구간이 폐쇄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어 올레길 곳곳에 부착된 표식만 잘 따라가면 된다고 친절히 조언해 주었다.


올레 1코스 안내소 간세 모양의 스탬프 보관함


올레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진 1코스는 전체 길이가 약 15km이며, 시흥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종달리, 성산 일출봉을 거쳐 광치기 해변에서 끝난다. 두 개의 작은 오름과 해변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는 다채로운 길이다. 시작점에 놓여 있는 간세와의 짧은 눈맞춤 후, 말미오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키 낮은 밭담 사이를 걸으며 이따금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옆으로 길쭉한 모양의 우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코스 초입의 우도가 보이는 풍경


오름과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생이던 시절에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섯알오름을 오르기도 했었고, 몇 년 전에는 중산간을 넘어가다 우연히 산굼부리를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마음가짐은 오름은 '걷는다' 라기보다는 '본다'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비로소 오름을 제대로 느껴볼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에, 지금 오를 이 능선을 나의 첫 번째 오름이라고 하고 싶었다.


입산이 제한된 말미오름을 우회하자 나의 첫 번째 오름이 될 '알오름'의 모습이 보였다. 알처럼 생긴 오름이라는 명칭의 유래 답게 능선의 완만한 곡선이 달걀의 그것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육지의 산의 모습과 달리 친근한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알오름에서 바라본 중산간의 풍경


급하지 않은 언덕은 오르기도 쉬웠다. 그 만만한 몇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금껏 알지 못했던 제주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날 제주의 지평선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장대하게 펼쳐진 구릉지대에 무수히 솟아있는 크고 작은 오름들. 이곳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제주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미처 깨닫지 못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눈 앞에 펼쳐진 낯선 봉우리의 개수 만큼 앞으로 제주의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알오름에서 바라본 종달리 바당


알오름 정상에서 비로소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버렸다.

마음 속의 잡동사니들을 탈탈 털어놓아도 한 줌 먼지조차 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짝 땀이 배어나온 이마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고, 3월의 봄 햇살은 종달리의 해변으로 가득 떨어져 눈을 부시게 했다. 그 너머로 아득히 우도와 일출봉의 모습이 보였다. 때론 가까이 들여다 보는 것 보다 이렇게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걷기 여행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제주의 풍경을 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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