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사고 싶어
이사 가기 일주일 전 가전제품 매장을 들렀다. 수평이 맞지 않은 채로 돌아가다 망가져버린 통돌이 세탁기는 이사하면 드럼 세탁기로 바꾸기로 했었는데 떠날 준비를 다 해놓고 보니 세탁기 없이 이사하게 생긴 것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서둘러 백화점을 들렀다. 가전제품 여러 개를 할 거면 백화점이 싸더라는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남편과는 몇 년만의 백화점행이었다. 위치 안내도 앞에서 현 위치를 짚으며 가전제품 매장을 찾아 걸었다. 많이 바뀌었네. 뭐가 없어진 것 같아. 대신 가구 매장이 크게 생겼네. 요리조리 구경을 하며 걷다가 알록달록한 가전제품을 만났다. 4…400??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직원에게 물으니 백화점은 신제품만 있는 곳이라고.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아이에게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물리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맞은편 가전제품 매장으로 가보자.
세탁기를 보러 왔다고 하자 남자 직원은 쪼르르 줄지어 있는 드럼 세탁기 앞으로 안내했다. 맨 앞에 자리한 세탁기부터 소개받았다. 가격을 묻고 옆으로, 안쪽 제품으로 옮겨갔다. 최신 모델과의 가격차이가 몇만 원도 채 나지 않는 점이 이상했지만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무광 스타일도 고려해 볼 만했지만 나는 유광 화이트로 작년 9월에 출시된 모델로 결정했다. 분리 세탁이 가능한 미니 워시는 별 고민 없이 빼고. 쏴아 쏴아. 세탁기를 결정하니 시원하게 쏘아올리는 물줄기에 눈이 갔다. 이건 얼마예요? 식기세척기였다. 빌트인은 못 한다고 하니 프리스탠딩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모델은 현재 전시된 제품 하나밖에 없다고. 그 자리에서 (거의) 바로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샀다. 결재하고 다음날 안 사실인데 모델의 스펙을 하나도 묻지 않았다. 백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하는데 10분도 채 고민하지 않다니..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아이 과자 사는 것 보다도 덜 고민했다.
이사한 다음 날 아침, 식기세척기 설치 기사가 왔다. 그런데… 가슴이 철렁했다. 고객님~ 여기에는 식기세척기를 설치할 수가 없어요. 이삿짐이 들어올 때 냉장고 위치로 남편과 내가 고민을 하니 작업자 한 분이 베란다에는 냉장고 자리가 나오지 않으니 식기세척기를 여기에 두고 원래 식기세척기 자리로 생각한 싱크대 옆에 냉장고를 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셨다. 냉장고에 자리를 양보하며 식기세척기 쓰기는 불편해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싶었는데. 몇 년 전에나 베란다에 설치했지 요즘은 규정상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남편은 바로 그럼 안 되는 거지 뭐, 했다. 뭐라고? 식기세척기 때문에 멀쩡한 냉장고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사분은 며칠 고민하시고 결정되면 연락 달라며 떠나셨다. 맙소사.. 그리고 식기세척기는 타공이 필요했다. 이 간단한 사실도 몰랐다니. 애초부터 전세살이에 식세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사 오기 전, 일주일 동안 해도 해도 즐거운 설거지였다. 곧 해방될 거라는 꿈에 부풀어서.
어제저녁은 치킨 말고 보리밥정식을 시켰다. 나물을 한데 섞어 비비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무설치 식기세척기가 있던데. 타공도 필요 없어. 그래도 부피가 있긴 하더라. 조리대가 작아지긴 하겠지만~~ 남편은 여기까지 듣더니 더 이상 식세기에 ㅅ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얼마나 바라 왔는데… 하지만 오늘 주방을 정리하고 이사 온 지 5일 만에 밥을 해 먹으려 요리를 하면서 좁은 주방을 실감했다. 남편이 왜 말을 끊었는지도 이해했다. 떡만둣국이 끓는 동안 불고기와 소시지를 구웠다. 저녁 맛있게 먹어. 8시 뉴스가 끝나니 식사가 마무리 되었다. 식기를 치우니 다시 그릇이 쌓였다. 설거지볼에 물을 틀어 두며 생각했다. 그릇들이 얼른 말라야 할 텐데. 아침에 설거지부터 하자. 식세기는 원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