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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01.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

Seoul, Korea  to  Bangkok, Thailand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James Blunt의 노래를 튼다. 익숙하지 않은 노래가 귀에 울려퍼질때 부터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조화를 이루며 얼굴을 때린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진다. 

여행은 비행기를 탈 때부터가 아니라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이다. 항상 걸었던 길인데 다르게 느껴진다.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되는 순간. 왜 평소에는 이런 마음가짐을 갖지 못하는 걸까? 지난 여행 때 스스로에게 했던 '현실을 여행 같이, 여행을 현실 같이'를 결국 못 지킨 거 같다. 


'부르르르' 갑자기 진동이 울리면서 전화가 온다. 누구지? 무의식적으로 받아본다. 


"SK텔레콤에서 이번 단통법을..."


누구긴 누구겠어. 왜 항상 속으면서도 받는 걸까. 이제 한 달간 스팸 하고도 안녕이겠구나. 


갑자기 소리 내서 웃고 싶어 진다. 뭔가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여행 다닐 때 가장 즐기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공항 버스는 생각보다 금방 온다. 반바지에 패딩을 입은 나를 어서 문명지에서 벗어나서 공항으로 데려가고 싶은가보다. 여러 상황을 생각하여 반바지에 패딩을 입고 가게 되었다. 여행 다닐 때는 돌돌 말면 주먹만 해지는 패딩이 경험상 최고다. 

버스에서 여행지에서 기록할 가계부 어플을 정리한다. 이런 거 한 번 만들어볼까 했는데 역시 이미 있었다.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하면 최소 10명이 그 생각을 하고 3명 정도가 실행을 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바가 있다. 물론 조사가 안되니 근거라고는 씨알도 없는 얘기겠지만 나름 수긍은 된다. 언제나 제일 중요한 건 실천력이다. 


이번 여행의 예산은 하루에 5만 원씩 150만 원으로 잡았다. 어제 서울역 환전센터에서 1시간을 기다려서 환전해놨다. 인도에서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쓴 걸 생각하면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킨 하는데 미얀마가 물가가 의외로 비싸다고 해서 일단 이렇게 잡았다. 남기고 오면 되지. 어차피 이 몸뚱아리 하나만 누울 장소와 먹일 음식만 있으면 충분하다. 

생각보다 공항에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여유가 많지는 않다. 5시 비행기라 조금 여유 있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시다. 조근 더 일찍 나올 걸...

바로 워커힐 식당 중 '하늘'을 찾아간다. 크로스마일리지 카드를 사용하면서 큰 혜택 중 하나인 식당 무료 음식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먹었다. 바보인게지. 어찌 보면 앞으로 한 달 동안의 마지막 사치일 식사를 준비한다. 

모든 음식이 무료다. 사실 곰탕을 먹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장 비싼 간고등어와 된장찌개를 주문한다. 어차피 내가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면 비싼 골 먹는 거보다 내가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바로 어제 여친한테 얘기했었는데 나도 결국 속물이다. 이건 내 만족이 아닌 매장의 손해를 우선으로 하는 선택일 뿐인데. 

근데 나 뿐만 아니라 다 이거 먹는다. 역시 우리는 한국인! 이거 알고 보면 이게 제일 싼 건데 일부러 비싸게 첵정헤놓은거 아니야? 이런 의심하는 거 보니 역시 한국인!


근데 희한하게 된장찌개에서 고수의 향기가...? 공항이라 이런가? 뭐지. 뭐 난 고수 워낙 좋아하니 땡큐 베리감사. 


나름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곰탕이 옳은 선택이었을 거 같다. 이것도 뭔 이별이라고 환송화(?) 명목으로 최근에 좀 달렸더니 속이 좋지 않다. 여행 가서 마셔야 하는데 그 전에 달려버렸으니...

식사를 마치고  티케팅하기 전에 편의점에 들린다. 해외 여행 갈 때는 작은 소주 3병을 꼭 사서 간다. 한 달이니까 10일에 한 병씩. 이 소주 3병이 어떤 즐거운 스토리를 제공해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여담으로 이 3병을 X알친구한테 사 달라고 했는데 육아와 야근에 지쳐 결국 못 만나고 떠났다. 이 기회를 빌어 육아와 업무에 시달리는 모든 유부남들에게 위로를...(하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행복이 있기에 안타깝지는 않다.)

티케팅하기에 앞서 짐을 정리한다. 세컨드 백이 없어서 종이 봉지를 가지고 왔다. 백은 카오산에서 내일 저렴하게 살 예정이라 어쩔 수가 없다. 원래는 검은 봉지에 그냥 들고 다닐까 했는데 그래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정관장 봉지를 들고 왔다. 그러고 보니 올 때 정관장을 혹시 몰라서 좀 챙겼다가 바로 뺐다. 냄새가... 공항에서는 왠지 마약개들이 몰려들듯 하고 여행 다닐 때는 왕따 되기 십상인 그런 냄새다. 잘 뺀 듯. 

봉투에 비행기에서 필요한 것들을 담는다. 여분 배터리, 킨들, 코보, 그리거 키보드. 근데 키보드는 왜 갖고 온 거지? 그때 그때 틈 날 때 쓰다 보니 거의 키보드를 안 꺼내게 된다. 단모음의 위력!

2시 50분부터 티케팅이라 옆에 앉아서 사색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줄 서기 시작한다. 이 여유 없는 사란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곧 나도 뒤에 선다. 아직 크로스마일리지 카드의 혜택은 끝나지 않았다. 들어가서 이번에는 기필코 꼭 라운지를 입성하고 말리라. 


가방을 그냥 들고 탈 수 있었는데 결국 소주 3병 때문에 부치게 되었다. 지금이야 괜찮은데 나중에 극악무도 에어아시아를 타게 되면 가방 부칠 때마다 돈 더 달라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소주를 포기할 수도 없고.


무사히 출국 수속을 마치고 허브 라운지로 향했다. 원래 마티나 라운지와 허브 라운지 두개가 외환 크마 카드로 되는 걸로 사이트에는 나오는데 막상 보니 마티나 라운지는 없어진 듯하다.

허브 라운지는 일반인이 다니는 곳에서 한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에 갖춰입은 직원들이 뭔가 위화감을 들게 한다. 본인이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꼭 이렇게 꾸며야 하는 걸까? 하긴 다른 방법이 막상 떠오르지도 않긴 하다. 하지만 뭔가 앉아있자니 자본주의의 특성상 상위 10%가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는 현실을 보는 거 같아서 불편하다. 너무 진지해지는 건가... 하긴 난 그냥 카드 연회비 2만 원 내고 들어왔지.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데 점심을 거하게 먹어서 파인애플 몇 개와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자리를 잡는다. 뭔가 많이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지난번 필리핀 갈 때 진에어인가 제주항공의 기내식을 잊을 수가 없다. 삼각김밥 하나와 물 하나... 주질 말던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키보드를 연다. 일주일 전에만 해도 이 키보드를 가져갈지 웨지 키보드를 가져갈지 그렇게 고민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아무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양갈래 길에서 항상 헤매는거 같다. 막상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잘 걸어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이건 나한테 하는 말 같군.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사람인에 접속해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놓는다. 이전에 작성해놓은 영문 자소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같이 올려놓는다. 사업을 5년 반하고 접은 지금, 과연 취업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꿈만 가지고 무작정 앞으로 나가기에는 또 너무 많은 현실을 알아버렸다. 일단은 떠나자. 그리고 떠나기 전에 그래도 준비는 다 해놓자. 양갈래 길에서 선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래도 최대한 좋은 선택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


시간을 좀 때우다 4시 좀 지나서 일어선다. 배에 신호가 살짝 오는 게 잠시 해우소에 가서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야겠다. 왠지 이곳 노블레스들의 화장실에 가고 싶다. 이 속물 같으니라고. 


나오니 4시 반. 여자친구한테 마지막 전화를 한다. 뭔가 아쉬워하지만 믿지 않는다. 지난번 제주 여행할 때 일주일만에 전화했더니 별그대 본다고 끊으라고 했던 것을 난 잊지 않았다. 본방도 아니었건만...


시간이 촉박하여 어서 끊고 114에 전화하며 탑승구를 향한다. 겁나 멀다. 내려갔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또 이동하고... 돈 없음 죽어야지. 언제 대한항공 타고 나가보나. 50분 까지 오라고 했는데 40분이 지났다. 화장실을 그냥 이곳에서 갔어야 했다. 거의 뛰듯이 탑승구에 도착해보니 줄이 없다. 

뭐지? 이미 다 들어간 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아직 탑승 시작을 안 했단다. 아 또 속았다. 보아하니 50분에 시작하는 듯하다. 뭐 빨리 오면 좋지.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아직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드디어 탑승이 시작되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 순간은 항상 설레다. 여행은 아까 시작됐지만 진정한 자유는 지금부터다. 이제부터는 내가 누군가를 찾지 않는 이상 누가 날 먼저 찾을 수 없다. 이 기분이 어찌 보면 여행이 가지는 중독성의 코어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아무도 옆에 안 온다. 냄새가 나나? 정관정은 분명히 빼놨는데. 뭐 배정 자리이니 그런 이유는 아닐 듯하다. 조금 있으니 탑승을  마무리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문을 닫는다. 이런. 로또 맞았다. 왜 굳이 내 운을 이런데 쓰는 것이지? 다시마 두개 들어간 너구리보다는 의미 있는 운이지만 이왕이면 진짜 로또 맞는 게 좋은데. 생각해보니 내 일정은 월요일에 출국, 금요일에 귀국이다. 이런 엽기적인 스케줄은 나 같은 백수 아니면 소화하기 쉽지는 않겠다. 팔걸이 올리고 누워서 가야 하나? 캡쳐돼서 진상 한국인 소리 듣기 십상이라 그냥 옆자리에 앉아서 편히 가기로 한다.

'우우웅'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출발한다. 원래 이륙시에는 항상 두근거리고 떨렸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뭔가 두근거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느낌이 사라졌다. 마치 일 년 전에 떠난 여행을 이어서 하는 느낌이 있다. 막상 방콕에 내리면 다르려나.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런 쇳덩어리가 하늘은 난다는게 신기하다. 물리적인 법칙이야 이해를 하지만 실제로 그걸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갑자기 추락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내가 추락해서 죽는다면, 나의 지난 삶은 의미가 있었을까?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내 삶의 목표를 세상에 이정표를 남기는 것에 두었다. 내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이정표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무엇을 하든 내 자신이 행복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 존재가 즐거운 의미라면, 내 삶도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을까.

출발한지 얼마 안돼서 기내식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뭘 벌써 주지. 이미 태국 시간으로 시계를 조정했더니 아직 4시 밖에 안됐는데. 대충 때우고 도착해서 맛있는 태국식 음식을 먹으라는 진에어의 배려인가 보다.

받아보니, 역시나다. 그래도 지난번 삼각김밥 만큼의 충격은 아니지만, 아까 라운지에서 억지로라도 좀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근데 먹어보니 또 은근 맛있다. 밥도 초밥처럼 간을 했고, 물도 시원하다. 그래, 이거면 됐지 뭔 욕심이더냐. 현재를 산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는 것. 그리고 만족에서 행복이 따라오는 거 아닌가 싶다.

5시간 비행이니 한숨 자고 싶지만 공부를 좀 해야 한다. 일정 중에 유일하게 예약한 오늘 숙소도 어떻게 가는지 전혀 모른다. 론리 플래닛을 열고, 태사랑에서  다운받은 지도를 피고 연구를 좀 한다. 앞으로 방콕 공항을 4번이나 더 와야 하는데 무조건 택시를 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단 대중교통을 최대한 이용해보자.


정리하고 지금까지 읽던 책인 '어스시 연대기'의 3번째 책을 마저 다 읽는다. 거의 한 달간 읽은 책인 듯하다. 세계 3대 판타지인 '어스시 연대기', '반지의 제왕', 그리고 '나니아 연대기'를 영어로 보는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다. 책 보다 잠들기를 수차례, 드디어 그래도 어스시 연대기 3권까지 봤다. 나름 묘한 분위기가 있는 책이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졸리다. 미안합니다 작가님. 


여행지에서 볼 첫 번째 책으로는 뭘 잡을까? 김영하의 '보다', '연금술사', '21세기 자본론' 중에 선택할까 하는데, 아무래도 처음이니 한글책인 '보다'를 펴기로 결심한다. 근데 예전에는 몰랐는데 킨들을 쓰다 코보를 오랜만에 쓰니 속이 터진다. 역시 문명은 사람을 인내력을 낮춘다. 예전에는 잘 참았던 것도 신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참기 힘들어진다.

책도 보고 도착해서의 버스편도 알아보고 있는데 문득 창이 열고 싶어 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열어보고 이유를 알았다. 여행에서의 첫 일몰을 비행기에서 맞이하였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서 돌아보니 다 창을 닫고 자고 있다. 깨울 수도 없고... 혼자서 감상해본다.

왜 일출과 일몰을 보고 있으면 감동이 오는 걸까?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내 자신이 너무 작아져서 일려나. 생각해보면 지금 죽을 듯이 괴로웠던 일도, 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건들도 과연 그 정도의 일이었을까 싶다. 모두 지나가면 다 부질없는 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대한 자연을 맞이하면 너무나도 작은 내 모습에 내 고민들이 얼마나 하찮은 거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고민들의 해결책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뭐든지 급하면 안 보이는 법이다.


공항에서 방콕 시내로의 첫 이동을 택시로 할까 하다가 버스를 타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부분 읽어보면 그냥 편하게 택시를 타라고 하는데 경험상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었다. 그 한 번을 오늘 해야겠다. 설마 이 나이에 국제미아가 되지는 않겠지. 여자친구가 마지막 한말이 "국제미아 되지 말고~" 였는데...


피곤해서 눈 감고 방금 외웠던 태국어로 숫자를 읊어본다. 

"능, 송, 삼, 씨, 하, 혹, 자엣, 바엣, 가오, 십"

숫자는 그나마 알아야 사기를 좀 피할 수 있겠지. 발음이 맞는지는 확인 불가하다. 근데 숫자 같은 기본적인 단어는 각국 언어가 왜 비슷할까? 교류가 있었어서는 아닌 거 같고 기본적인 생각은 비슷하기 때문일런지. 엄마, 아빠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비슷한 거 보면 정말 뭔가 있지 싶다. 근데 도대체 존칭이 "캅"인건지 "크랍"인건지 알쏭달쏭하다. 한글책에서는 캅이라고 나오고 영어로는 크랍이라고 나온다. 예전에 닉쿤이 사왓디'캅'이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 듯 하긴 한데 말이지.


책도 보고 숫자도 외우다 보니 땅에 도시의 별이 하나 둘 떠오른다. 생각보다 6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저가항공을 타면서 3자리나 독점하는 바람에 은근히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곧 안내 방송이 나오고 바퀴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착륙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태국은 기분 나쁜 습기를 먼저 선사해주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습기 덕분에 동남아에 도착한 곳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출국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하였다.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뭔가 위화감이 아직도 없다. 여행 온 게 아니라 그냥 퇴근하는 느낌이다. 올라가자마자 여행안내소를 가서 카오산으로 가는 버스를 물어본다.

여기서 첫 번째 에러가 모습을 드러낸다. 게스트하우스 홈페이지에는 분명히 공항 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오라고 했는데 그 버스가 지금은 없단다. 


뭐 어때. 그럼 어찌 가느냐 했더니 일단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간 후에 택시를 타라고 일러준다. 그래 이번에 태국 지하철 한 번 타 보겠군. 


태국의 지하철은 표가 무슨 포커칩 같이 생겼다. 45바트를 지불하고 지하철에 오른다. 칩같이 생겨서 어디에 넣는 건 줄 알았는데 그래도 RFID 방식이다. 

뭔가 이국적인 지하철 분위기에 어색할 법도 하건만 또 그냥 1호선 정도 탄 느낌이다. 뭐지? 왜 여행 시작하기도 전에 적응해버린 거지? 이럼 나가린데... 워낙 서양형님들도 보이고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님 네 친구 말 맞다나 내가 원래 이쪽 스타일이라 그런가? 이건 아니지만 인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종점 안내가 나오길래 일어섰는데, 너무 빨리 일어났다. 여기는 한 정거장이 엄청 긴 그런 기차였던 거다. 그래도 다시 앉기는 좀 그래서 쿨한 척 하며 무거운 가방을 매고 서있는다. 

문제는 이번 정거장이 아니었다는 거. 잘못 들었나 보다. 여기서 부끄러워하면 지는 거. 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태사랑 지도를 열어서 좀 보니 대충 감이 잡힌다. 오기 전에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니 역시 타는 순간 바로 윤곽이 머리에 들어온다. 택시를 바로 안 타길 잘한 게 어차피 택시 타도 이 방향으로 온다. 일단은 이 지하철 가는 데까지만 가고 택시를 타되 내일 대중 교통을 좀 알아놔야겠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때문에 방콕을 3번 더 와야 하는 저주에 걸렸으니 별 수 있나.

이번에는 진짜 종점에 도착해서 내린다. 내려오니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다. 방금 전에 태사랑 지도 보기를 잘했다. 서있는 택시 타지 말고 길에서 잡을  것.이라고 쓰여 있던 내용을 귀담아 삐끼를 물리치고 길로 나선다. 

"쌈쎈 쏘이 혹"


고백하자면 이 단어를 거의 한 시간은 외운 듯하다. 택시한테 말하니 타라고 해서 탄다. 예전에 인도 내리자마자  사기당한 생각이 난다. 이런 초행은 무조건 당당해야 한다. 미터기를 안 누르길래 당당하게 눌러달라고 요청한다. 약간 당황하시더니 미터기를 누르신다. 훗.


택시에 보는 방콕의 첫인상은 예전 영등포 굴다리 같은 느낌이다. 이전에 꼬창 왔을 때는 공항 근처에서 자고 바로 국내선으로 떠난지라 시내는 처음이다. 초행 티 날까 봐 사진도 안 찍는다.


한 20분 갔나. 기사님이 도착했다고 내리라고 한다. 솔직히 살짝 당황하고 만다. 저녁 11시 넘은 시간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후미진 골목에서 내리라고 하다니. 자세히 보니 쌈 센 6이라고 쓰여 있어서 맞는 거 같긴 하다. 혹시 오늘 숙소인 Roof View를 아시냐고 물어보니 모르신단다.

뭐 일단 내렸다. 그리고 지도를 보니 근처 호텔을 보고 대충 현재 위치를 알고 같다.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여기는 여행자도 하나도 안 보이고 현지인들만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거나 그러진 않다. 사실 무서울 필요가 있나. 다 같은 사람인데.

한참을 들어가니 왼쪽에 숙소가 보인다. 토닥토닥. 초행인데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해준다. 공항에서 택시 타면 대략 300바트 나오는데 100바트 정도에 왔으니 약 200바트를 아낀 셈이다. 거의 하루 숙소 값이니 절대 무시 못한다.


들어가서 수속을 하니 열쇠를 주는데 5층이다. 아놔... 여기 엘리베이터 없는 거 분명히 알고 아고다에서 예약할 때 낮은 층 달라고 했는데. 하긴 나같아도 챙겨주진 않을 듯 싶다. 그냥 한 번 슬쩍 웃어주고 가방을 짊어지고 올라간다. 이래서 가방은 가벼워야 하는 법이다. 그래도 짐은 거의 안 싸서 이번 내 여행에서의 삶의 무게는 그리 버겁지 않다.

올라와서 방을 들어가니 이제 뭔가 좀 여행 온 느낌이다. 서울에서의 인상으로는 허술하다는 첫인상이지만, 여행지에서를 생각해보면 궁궐이다. 에어컨이 있고, 화장실에 뜨거운 물이 나온다. 게다가 방에서마저 느리지만 와이파이가 터진다. 그러면서 가격은 380밧. 여행자들한테 소문난 이유가 있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뭔가 배가 고프다. 진에어에서 기내식은 부실하게 주고 컵라면을 파는 바람에 냄새에 몸이 중독되어버렸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먹을 걸 찾아볼까? 아니 첫날인데 그냥 자고  내일부터 움직여. 천사와 악마의 유혹 속에 그냥 오늘은 머물기로 한다. 근데 어떤 게 천사지?


오늘 하루는 여기까지. 와이파이가 터지니 한 번 오늘의 여행기 업로드를 시도해봐야겠다. 오늘은 그다지 한일도 없는데 뭔 글을 이리 많이 썼는지 모르겠다. 하긴 시간이 남아도니 글을 쓴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일은 확실한 미션이 있다. 카오산 가서 세컨드 백을 구해서 정관정 종이봉투에서 벗어나기, 한 달 동안 입을 여행자 느낌 나는 허름한 옷 구매하기, 그리고 맛있는 음식 섭취하기! 아마도 내 진정한 여행은 내일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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