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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Apr 21. 2024

[대기업 계열死] 1년짜리 계약직이 3년을 버틴 이유

입사이유&서론


대기업 계열사인 현 직장. 본래 1년 이상 이곳을 다닐 마음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진심이었다. 나에게 이 직장은 사회적 인간으로 살기 위한 '재활치료'의 공간일 뿐이었기에.



지난 회사에서는 ‘자진 퇴사’를 3달간 요구받았다. 약간의 우울증과 깊은 불안 증세, 시간감각이 흐려지는 불면증을 얻었다. 수면제와 안정제를 처방받으며 어떻게든 다녔지만 결국 해가 끝나던 때 즈음 자진 퇴사했다.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물러설 의지가 없음을 버팀으로써 보여주며 최소한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허나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내 안에서 노동자로서의 가치가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 직장에 대한 믿음, 노동자로서의 권리, 일에 대한 열정은 물론 사회적 만남, 협동, 성취감, 성장과 같이 직장에서 기대하고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즐거움이 불필요하다 느껴졌다. 지난 3개월간 이를 위해 포기한 내 인간성 존엄성이 거대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번은 퇴사를 모호하게 종용하던 인사팀 실장은, 후반 즈음에는 자진 퇴사를 아래와 같은 말로 회유했다.



"당신이 이 회사에서 받는 돈이 얼마인가요?"

"연봉 3,400만 원이죠."

"지금 이 회사여야만 해요? 다른 곳에서 이 돈, 쉽게 받으며 일할 수 있어요. 금방 취업될 거예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남아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그저 빨리 나가라는 겁박인지, 솔직한 조언이었는지, 최후에 이뤄질 협상을 위한 의중 확인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허나 실장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질문은 머리에 꽉 들어찼다. 한밤중 몇 번씩이나 깨며, 그토록 사랑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며 하루하루를 안정제에 의존해서라도 출근하는 내가 나도 궁금했으니까.  



압박당하면서도 자리를 유지하려 애썼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위에 열거했던, ‘사회에서 내가 자기 몫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가치가 소중해서였다. 다달이 들어오는 생명 연장의 돈. 하루의 시간을 채울 과업이 있다는 것.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친밀도를 높이며 마치 퀘스트 깨듯 업무를 하며 느끼는 자아 충족감. 분명 소중하고 나를 인증하는 것이지만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끝내는 내가 스스로 '나는 이 회사에서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라고까지 자기 비하하며 지켜져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사실을 결국엔 돌고 돌아 깨달았다. 사직서에 내 손으로 ‘퇴사 이유 : 개인 사유‘를 기입한 뒤 서명을 하고 통장에 입금된 4달 치의 금액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현 직장을 오래 다닐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직장인'으로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당장의 곤궁한 통장을 채우고, 몇 개월의 공황과 심리적 불안으로 가난해진 머릿속을 최소한 재활하자는 것만이 재취업의 이유였다. 고고익선, 다다익선이라고. 돈을 많이 주고 사회적으로 입지가 좋은 회사이면 좋겠지만 그뿐이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다는 콧줄이 기왕에 고품질의 제품이라면 좋겠지만, 콧줄은 콧줄일 뿐.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언제든 떼야 하는 존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고용 안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정규직이 으레 얻는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자로서의 권리, 회사의 의무는 단순히 고위 관리자 한 사람의 변심으로 손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 나에게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이는 콧줄의 색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결국 자진퇴사 후 한 달은 밀린 잠만을 자고, 한 달은 취업 준비를 한끝에 국내 한 대기업의 계열사에 입사했다. 그 계열사가 대기업의 수많은 계열사와 수만 임직원 중에서도 앚주 작은 %만을 차지하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굳건히 그들만의 ’대기업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계약직 2년을 지나 현재는 정규직. 본래의 계약기간 1년만을 채우고 퇴사하겠다는 목적은 사라진 채 여전히 재직 중이다. 퇴사를 종용당하던 그 시절보다는 살 것 같다. 더 이상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지도, 무의미한 면담과 퇴사 요구를 받지도 않고 복용하던 약도 모두 중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숨을 쉬는 방법을 잊은 것 같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적당한 안락함, 적당한 월급과 한결 마음을 놓은 가족의 안도가 매월 코로 들어온다. '어쨌든 하루를 잘 보내는 것' 같은 기분에 도취해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단 지금의 안락함에 게을러지고 있다. 그래도, 작은 반항으로 아웃사이더가 되길 계속해서 자처한다. 이곳이 마지막 직장이 아닐 것이라고 항상 맹세한다. 닥친 업무가 야근을 줄지 안 줄지 보다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를 고민해 고른다. 엄격한 위계질서에 취해 받들고 받들어지길 원하기보단, 사람답게 살기 위한 나의 가치관에 근거해 무리 속에 존재한다.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마냥 멋진 일을 하지도 않고, 똑똑한 인재들만 모이지도 않았으며, 한 편 후리가 흔히 말하는 '꼰대' 대신 새로운 '꼰대'가 존재하는 이곳. 또 탄탄한 복지가 마냥 무릉도원처럼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닌 이곳. 사원과 외부인 사이 제3자의 눈으로 대기업 계열사를 관찰해 기록으로 남긴다. 콧줄을 뗄지언정 스스로 살아갈 결심을 갖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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