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벌써 14일이나 지났다. 그동안 라면 한 젓가락 입에 가까이 대지 않았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정말.
라면을 끊은 지 2주, 336시간 동안 정말 한 번도 라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보통 그렇게 결심하고서 며칠 안에 몸이 회복되면 가장 먼저 찾는 게 라면인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짜 제대로 '헤어질' 준비가 된 것만 같다. 내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라면을 안 먹다니. 이번에는 제대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라면을 그만 먹는다'는 외침은 마치 흡연자가 새해마다 결심하는 '금연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야심 찼던 마음이 3일 후에는 스리슬쩍 물러지고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함께한 라면과 헤어지는 것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빠를 닮아 어려서부터 면을 좋아해 밥보다 면을 더 찾았다. 특히 엄마가 없어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덕에 매일 같이 라면을 끓여 먹였다.
얼마나 간편한가. 가스레인지 불만 켤 줄 알면 끝이다. 뒤에 적힌 요리 법대로(한 적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물을 넣고 면, 수프를 알아서 넣고 3분 정도를 끓이면 완성이니 나처럼 요리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다.
얼마나 맛있는가. 뭘 먹어도 배고프고 춥던 수험생 시절,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 하나에 삼각김밥을 곁들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던지. 라면 물을 받아 뚜껑 덮고 젓가락으로 요령 있게 고정시켜 놓은 후 친구랑 수다 떨며 기다리던 그 4분이 얼마나 달콤한지. 어디서나 간단히 2,000원 안에 끼니가 해결되니 세상에 이런 소울 푸드는 없을 것이다.
면을 사랑하고 밥 먹을 때 꼭 국물이 있어야 하는 내게 라면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짭짤하면서도 얼큰, 칼칼한 그 국물과 꼬들꼬들한, 혹은 가끔 푹 익혀 퍼진 면발 모두를 사랑했다. 밥상머리 교육 하나만큼은 진심으로 엄했던 우리 아버지도 내 라면 사랑은 말리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편식으로 점철되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 밥상에서 나만 육개장 사발면을 끓여서 먹던 날을.
학교에서도 급식이 지겨우면 매점에 가서 꼭 컵라면을 까먹었다. 남자 친구가 생겨 연애할 때도 자주 갔던 곳은 분식집. 떡볶이, 라면, 김밥 등을 주문해서 하나씩 먹을 때면 여느 스테이크, 파스타 못지않게 맛있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입맛을 가진 나를 당시 남자 친구들은 신기해했다.
임신을 했을 때는 어떻고. 커피는 독하게 열 달을 참아 한 방울의 카페인도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애초에 라면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입덧을 핑계로 김치 사발면, 미역국 라면, 짜파게티 등을 끓여 먹었던 것 같다. 뱃속의 아이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엄마가 즐거워야 너도 즐겁대'라고 위안하며 후루룩 쩝쩝 면발을 넘겼다. 싹싹 비운 냄비를 보며 후회한 적도 많았지만 어느새 또 라면 물을 받고 있는 나를, 수시로 발견했다.
가리는 라면도 거의 없었다. 신라면을 주로 먹어 왔지만, 스낵면, 안성탕면, 무파마, 부대 찌개면, 진라면 매운맛, 순한 맛, 삼양라면, 짜파게티, 불닭볶음면, 팔도 비빔면 할 것 없이 그때 그때 당기는 것들로 골라 찬장을 채웠다. 집에 쌀은 떨어져도(?) 라면은 떨어지지 않게끔 그렇게 살림을 꾸려왔다.
그런데, 이런 내가 라면과의 이별을 선언한 것이다.
지난번에 아주 심하게 아파 위액까지 토한 날이 사실 결정적인 계기였다. 여지껏과 다르게 정말 심하게 아파지니 내 식습관이 정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여태까지 해왔던 습관대로라면 난 분명 약을 먹고 위가 가라앉으면 또 국물이 당긴다는 이유로 육개장 사발면을 사다 편의점 김밥과 함께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엔 칼칼한 국물이 당긴다며 삼양라면 매운맛에 떡을 넣어 끓여 먹을 것이고, 일요일이 되면 '일요일엔 짜파게티 요리사'라며 짜파게티 3개를 끓여 잔뜩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겠지. 그리고 정확히 3주 후 다시 위가 아파 토하고, 병원을 가고, 수액을 맞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종일 토하는 기분, 물을 먹어도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조여 오는 기분을 또 느껴야 한다니. 심지어 다달이 겪어내야 한다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거의 2년 동안 다달이 위가 아프다는 것은 분명 내 식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일 테다. 그것은 분명 내 몸이 보내는 절규일 것이다. 무려 2년 동안 내 몸은 꾸준히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너 지금 좀 심각해, 멈춰, 이제 좀 네 몸 챙겨,라고.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2년 동안 정직하게 무시해온 셈이고.
이렇게 먹고 살다 간 정말 몇 년 안에 큰일 나겠다 싶은 순간 가장 먼저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라면'이었다. 수년간 끊지 못했던, 자주 먹었고, 나를 자주 아프게 했던 것. 튀긴 면, 짠 국물, 뭐 하나 좋을 것 없는, 그래도 내가 정말 좋아했던 자극적인 맛으로 가득한 밀가루 범벅인 라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밀가루 음식 중 내 몸의 70% 이상을 차지했을 그것. 그것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멈춰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목표보다는 강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라면'을 멈출 수 있다면 2년 간 반복되어온 아픔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절실했다. 더 이상 변기 앞에서 토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두통에 짓눌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종일 TV만 보던 날, 자다 펑펑 울며 '나가서 놀고 싶어. 집은 너무 답답해'라고 잠꼬대하는 딸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몸의 소리를 들었으니 실행에 옮길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14일째 라면을 먹지 않고 있다. 수납장 한편엔 라면 몇 개가 있지만 아직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먹고 난 후의 아픔이 연상되어 입맛이 뚜욱, 떨어지고 만다. 라면 덕후에게 실로 대단한 일이다. 아직은 내 의지력이 의심되지만, 그래도 일단은 해본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