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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Jan 21. 2022

“엄마, 이번 설에도 못가요.”

아들 친구 엄마들이 모였다.  아들이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엄마들 모임이다.  오래된 관계인만큼 무척 편하다. 그래서인지 마음만 편한 게 아니라 만날 때 옷차림도 편해졌다.  처음엔 최대한 멋을 부려서 잔뜩 각(角)을 잡고 모였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엄마의 각’이 ‘아들의 기(氣)’를 살린다고 믿었던 것 같다.  

   

“수민 엄마! 오늘 멋지게 차려입었네.”

“호호호. 신경 좀 썼지.”

“어디 가는구나?”

“모임 마치고 친정에 다녀오려고.”     


 수민 엄마가 이번엔 다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을 부렸다.  ‘블링블링’, ‘삐까뻔쩍’ 하게.  수민 엄마는 평소 이런 차림이 아니다.  대부분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괜찮은 외투 하나 걸치는 지극히(?) 편안한 스타일이다.  그런 사람이 친정에 갈 때만 완벽한 탈바꿈을 한다.

 

“오늘은 시댁 갈 거야”

“저기요. 말 안 해도 알겠어요. 호호호.”

“시댁 갈 땐 이렇게 입어야 용돈을 받을 수 있잖아.”

“호호호. 부자 시아버지 두셔서 좋겠어요. 부럽습니다.”

       

‘시댁에는 평범하게, 친정에는 럭셔리하게!’  

   

“애미야! 넌 더 살찐 것 같다.”

“아휴, 애비는 갈수록 살이 빠지고.”

“애미야! 그 옷은 못 보던 것 같은데 새로 샀니?”

“애비는 일하는 사람인데 신경 좀 써야겠다!”

“애들 입은 옷이 비싸 보인다.”    

 

 이런 얘기, 며느리라면 한 번쯤 들었을 법할 것이다.  특히 설 연휴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부엌으로 달려간 며느리라면 그 마음이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히 며느리들은 시댁용 ‘츄리닝’(트레이닝복)이 있다.  이에 반해 친정에 츄리닝을 입고가면 누구나 후회한다.  ‘딸이 힘들게 사는지’, ‘형편이 어떤지’ 친정엄마의 긴 한숨 소리를 내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수민엄마는 자신이 어떻게 사는 지를 친정엄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방금 택배 잘 받았어요!”

“그래, 우예 시금치가 개안나(괜찮은지) 모르겠다!”

“엄마! 이번에도 못 가요...”

“그 속에 들기름도 넣었는데 안 깨졌더나?”

“이번엔 꼭 가려고 했는데...”

“아이스박스에 괴기(생선)도 개안터나(괜찮나)?” 

    

 필자와 친정엄마는 이번 설을 앞두고 또 이렇게 동문서답 중이다.  친정엄마는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  딸이 “이번 설에도 친정에 못 간다!”는데 친정엄마는 택배 이야기만 한다.  차마 “서운하다”는 말을 못 꺼내서다.  대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번 설에도 큰딸이 못 오는구나’하고.   

  

 집안마다 ‘가풍’이란 게 있다.  한 집안의 문화라고 보면 된다.  필자 시댁은 ‘딸은 출가외인’이다.  한 번 시집가면 끝이다.  아주 큰 일이 아니면 굳이 딸은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무슨 조선시대도 아닌데!” 싶었지만 정말 시누이들은 시아버지가 수술하거나 돌아가시기 직전에나 나타났다.  시댁의 독특한 문화라서 그러려니 했다.  더구나 시아버지와 함께 살다보니 명절날 혼자 두고 친정에 갈 수 없었다.   

  

‘못된 것은 먼저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남편이 그렇다. 여기서 왜 못된 것이냐면 필자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부전자전. 시아버지가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하더니 남편도 똑 닮았다. 언제부터인지 필자도 친정에서 ‘출가외인’이 됐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절 연휴에 친정을 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친정엄마와 매번 약속했었다.

“엄마! 시아버지 돌아가시면 명절에도 내려가서 엄마랑 동생들이랑 같이 있고 조카들도 보고 자주 갈게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상황이 여의치 못해 못 내려간다.  일을 할 때는 일이 많아 바빠서, 시댁 일 때문에 못가고, 아들 시험기간이 끼어서 못가고, 아플 때는 아파서 못 갔다.  어쩜 이리도 일도 많고 탈도 많고 변명거리가 많은지.  이번 설에도 친정에 안가면 아들이 공연 예매를 한단다.  ‘아, 어쩐지 아들이 명절에 필자를 찾지 않을 것 같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이런 제목의 기사가 오른다.

“설에 집에 못가요!” 취업, 시험 준비, 아르바이트에 치인 청춘들.

“너는 집에서 공부나 해!” 명절에 친척들을 못 만나게 하는 부모들.

“10명 중 4명, 설에 고향집 안 갔다. 학업 부담에 잔소리가 싫어서”,

“설 연휴 부모가 자식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한다.  한 남자가 바다를 항해하던 중 태풍에 휩쓸려 무인도에 난파되었다.  남자는 살기 위해서 배에 실린 식량으로 간신히 버텼다.  그러다 식량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땅에 곡식 씨앗을 파종하기로 했다.  그런데 땅을 파다가 금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남자는 언젠가 이 무인도에서 구출될 상황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이 금을 가져가면 얼마나 부자가 될지 상상했다.  남자는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금을 캐었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 금은 엄청나게 많이 쌓여갔고 어느새 겨울이 왔다.  이제 곡식이 다 떨어졌다.  남자는 굶어 죽었다.   

   

남자는 봄날 파종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  금보다 소중한  목숨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곡식 씨앗을 파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었더라면 살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금에 정신을 팔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것에 마음을 팔려 봄날 ‘파종의 시기’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누구에게나 좋은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나 특정 기준에 따라 다르다.  학업, 취업, 진로, 결혼, 승진 그리고 건강, 여행, 힐링, 휴식, 우리 세상살이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혹자는 요즘 세상에 명절이 의미 없다고 한다.  불편한 잔소리를 듣기 싫고 친척들과 비교 당하기 싫은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더 부모와 가족, 친척이 한자리에 모일 날은 그리 많지 않다.

     

“물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알게 되는 건 물고기”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좋은 때에 좋은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짠! 하고 자랑스럽게 나타나고 싶지만 그 때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 그리고 설 연휴,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 본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사랑은 무엇일까?” 지체없이 “나의 어머니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필자 역시 좋은 때를 기다리지만 오늘도 많은 것을 놓치고 산다. ‘올 설엔 놓치지 말아야지!’ 마음먹지만 이번에도 친정엄마를 놓치고 있다.  


어느새 필자 눈가가 뜨뜻해 온다. 눈을 감으니 필자와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 보인다.     

“엄마! 이번 설에도 못가요.” “엄마! 사랑해요!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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