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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Jan 28. 2022

아내를 자랑할까, 와이프를 자랑할까

아내를 아내라고 지칭해도 될까

아내 또는 와이프가 만들어 준 도시락


 2022년은 나의 겨울 방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이의 겨울방학은 1주일 뒤에 시작된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1주일 정도 주어졌다. 아이 등원 후 하원까지 5시간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월요일은 중고서점에 들러 방학 기간 중에 읽을 책을 샀고, 화요일은 아내와 함께 데이트를 했다. 수요일은 태조산 등산을 했으며 목요일과 금요일은 도서관에 가서 반나절 동안 책을 읽었다. 5시간이라는 온전한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감사히 여기며 아이 등원 후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햇살이 비치는 자리에 앉아 읽고 싶은 책을 원하는 만큼 읽고, 쓰고 싶은 게 있으면 기록하는 시간들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도서관에서는 대략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2시 반까지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점심시간이 있었다.


 집까지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까워 도서관 근처에서 사 먹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삼각김밥과 짜장라면으로 때우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천안에서는 편의점 취식이 금지였다. 어쩔 수 없이 김밥천국에 들러 라면과 김밥을 함께 사 먹었다. 김밥과 라면, 둘 다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칼로리다. 하지만 하나만 먹는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선택이다. 추운 겨울에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는 음식 중에 가장 저렴한 것이 라면이고, 다양한 식재료로 풍성한 맛을 낼 수 있는 음식 중에 가장 저렴한 것이 김밥이다.


 어제 라면과 김밥을 사 먹었다는 나의 말에 신경이 쓰였는지 금요일에는 아내가 친히 도시락을 사 주었다. 도시락 안에는 유부초밥과 삶은 브로콜리가 들어 있었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따뜻한 컵라면과 함께 먹는 유부초밥은 꿀맛이었다. 도시락 사진을 찍은 후에 아내에게 사진과 함께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나의 휴대폰에 아내는 '이쁜 마누라'라고 저장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내'를 지칭할 때 나는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에 대해 늘 고민이었다. SNS에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아내': 네이버 국어사전 (naver.com)


 나는 지금까지 줄곧 아내를 아내라고 불렀다. '아내'의 사전적 의미는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라는 뜻이다. 아내의 유의어로는 '와이프, 집사람, 마누라, 안사람, 안식구, 색시, 처, 내자, OO 엄마 등의 여러 호칭이 있지만 나에게는 '아내'라는 호칭이 가장 정겨웠다. '집사람, 안사람'과 같은 호칭은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반영된 단어이다. '아내'는 집 안에서 살림살이만 한다는 가부장적 세계관 입장에서 쓰이는 단어이다. 무심코 '집사람, 안사람'이란 단어를 쓰는 남자들이 여전히 있지만, '아내'를 지칭하기에 좋은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OO 엄마'의 경우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 결여된 단어이다. 'OO 엄마'는 보통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제3자에게까지 'OO 엄마'라고 쓰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나마 '마누라'라는 단어의 어원이 좋은 의미이긴 하다. '마누라'는 상전이나 중년 여인이란 뜻을 지닌 왕실의 극존칭어였다. 하지만 '영감, 양반'처럼 이제는 아내를 낮춰 부르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여편네'와 더불어 시절의 나쁜 떼가 묻어 안 좋은 의미가 되었다. 간혹 아내를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 '마눌님, 마나님'이란 단어를 SNS 상에서 볼 때가 있는데, 동등한 부부 관계에서 상대에게 존칭의 뜻을 지닌 '님'이란 글자를 붙이는 것 자체가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 남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외국어인 '와이프'이다. 와이프라는 외국어는 국어교사인 나의 입장에서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내 주변의 동료 국어교사들도 '와이프'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편이다. 사실 그동안 '와이프'라는 단어를 주야장천 사용했던 국어과 선후배, 동기들의 행동을 은근히 싫어했었다. (물론 나의 생각이 유별나 보일 듯해서 그들을 지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와이프'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그들의 행동이 치기 어리다고는 늘 생각했다.


 결국 이래저래 여러 이유로 빼고 나면 남은 단어는 '아내'뿐이다. 그래서 그동안 아내를 아내로 지칭해서 말도 하고 글도 써 왔다. 그런데 작년에 나의 글쓰기 멘토인 최호진 작가께 내가 쓰는 글에서 가부장적인 색이 있다고 지적해 주신 바가 있다. 그의 용기 있는 피드백으로 인해 내가 사용하고 있던 언어들을 점검해 보았다. 그 여러 단어들 중에 '아내'도 있었다. 알고 보니 안사람, 집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집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설이 있었다. '아내'의 옛말이 '안해'이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안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안해'의 '안'은 집안이라는 뜻이다. 아내라는 단어 역시 여자는 집 안의 살림살이를 담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 단어였던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면 아내를 지칭하는 우리 고유어 중에 남성 중심의 사고가 반영되지 않은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필경 내 주변 사람들처럼 결국 나도 '와이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아내'를 지칭하는 단어들 중 그나마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와이프'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후에는 나도 나의 아내를 지칭하는 단어로 외래어 아니 외국어인 와이프를 사용하게 되었다. ('와이프'는 '허즈번드'와 마찬가지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외국어이다.)


 아내와 달리 '남편'이란 단어는 여전히 오염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혼인하여 자신의 짝이 된 남자'를 남편이라고 부른다. 우스갯소리로 남편이 '내 편이 아닌 남의 편인 사람'이라는 농담으로 쓰이기도 한다. 간혹 신혼부부의 경우 '신랑'이라는 예쁜 단어를 쓰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내 주변에 남편을 허즈번드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남편'이라는 단어를 쓴다. (나의 경우 지인의 남편을 부를 때 높임의 의미를 담아 '사부님' 또는 '부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그러고 보니 남편에 대응하는 말로 '여편'도 있다. 하지만 여편은 '여편네'라는 단어로 이미 너무도 많은 서사를 통해 더럽게 물든 단어이기도 하다. '여편네'라고 하면 꼭 술에 취한 남편이 자신의 부인을 때리거나 밥상을 뒤엎는 장면이 등장해야 할 듯하다.



와이프 또는 아내가 만들어 준 케이크



 지난주에 오랜만에 아내가 솜씨를 발휘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아내가 만든 케이크를 자랑하고 싶어서 인스타그램 앱을 켰다. 그 순간 또 고민이 들었다. '아내' 자랑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와이프' 자랑이라고 표현할 것인가. 사실 나는 외국어인 와이프보다는 그래도 순우리말인 '아내'라는 단어가 좋다. 하지만 언어가 사람들의 의식을 만들어가는 무서운 기능을 지녔다는 측면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래도 가치중립적인 '와이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다. 결국 '와이프'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아내'라는 단어에 대한 미련은 끝끝내 버릴 수 없을 듯하다. 나는 여전히 '아내'라는 단어가 정겹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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