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하루 Mar 20. 2024

싱가포르에 살면서 뭐가 제일 좋냐고 물으신다면


누가 싱가포르에 사는 것의 장점에 대해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헬퍼 제도를 꼽을 것 같다. 싱가포르는 법적으로 주인집에 입주해서 사는 헬퍼만 허용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입주도우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5년 전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남편은 싱가포르에서 직장을 다니지 않을 예정이었고, 아들도 이미 초등학교 6학년으로 손이 가지 않는 나이라서 예전에 자기가 데리고 있던 헬퍼를 소개해주겠다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렇게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매일같이 한 집에 사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코로나로 몇 곱절이 된 집안일에 지친 남편이 가정주부 포기를 선언하면서 우리 집에도 헬퍼가 들어오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친구가 소개해주려던 그 헬퍼도 마침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우리는 운 좋게도 그녀를 고용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헬퍼를 ‘직원’이라고 부른다. 법적으로도 실제 내가 고용주(employer), 헬퍼가 직원(employee)이 되어 계약을 맺게 되고, 고용주들은 고용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수칙들에 대해 온라인 교육도 이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집에서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헬퍼의 이름이나 헬퍼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OO한테 저녁 메뉴 이야기했어?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 우리가 본인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혹은 헬퍼라는 영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직원이 깜짝깜짝 놀라거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걱정할 수도 있으니 직원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워낙 눈치도 빠르고 넷플릭스 등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있어서 가끔 우리 대화할 때 자기도 웃는 것을 보면 ‘직원’ 같은 쉬운 한국말은 이미 한참 전부터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을 것 같다.


헬퍼가 필요 없다던 5년 전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는 이제 그녀가 없는 싱가포르 생활을 상상하기 힘들다. 남편과 나는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고, 아들은 입이 짧고 까다롭다. 처음에 면접 볼 때 본인은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해서 걱정 말라고 우리가 가르쳐주겠다고 안심시키고 채용을 했는데 웬걸 그녀는 매우 빠르게 한국 요리를 마스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일이 영어 레시피를 정리해 주고 설명해 주거나 유튜브 채널 중 영어 자막이 나오는 것을 골라서 보내주곤 했는데, 이제는 유튜브 링크 아무거나 주면 본인이 스크린샷을 구글 번역기에 돌려서 새로운 요리도 척척 만들어낸다. 메뉴의 조합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당연히 감이 없었는데 이제는 메인이 제육볶음이면 다른 반찬은 안 매운 계란말이나 감자볶음을 하고, 전을 해달라고 하면 고추장찌개도 만들겠다고 한다. 솔직히 요새 한국에서보다 더 잘 먹는 것 같다.


이 글의 첫 문장, ‘누가 싱가포르에 사는 것의 장점에 대해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헬퍼 제도를 꼽을 것 같다’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건 철저하게 고용주인 나의 입장이고, 헬퍼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헬퍼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특히 아이들 교육을 잘 시키기 위해 꿈을 가지고 타지로 온다. 나의 헬퍼도 딸이 2살이 되었을 때부터 외국에서 헬퍼 생활을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 받는 월급이 우리 기준으로는 참 적은데도 필리핀 본국의 일반적인 월급쟁이나 심지어 의사 같은 전문직 보다도 훨씬 많이 벌기 때문에 헬퍼가 번 돈으로 집도 지었고, 딸도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다. 마음 한쪽이 항상 불편한 것은 그녀의 딸이 내 아들과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나기 때문이다. 내 아들에게 밥을 차려줄 때마다 얼마나 딸 생각이 날까…


며칠 전 헬퍼가 5월 말에 딸이 중학교를 졸업한다고 올해 말에 나올 휴가를 당겨서 미리 쓰고 싶다고 한다. 사실 아직 필리핀에 갔다 온 지 1년도 안 됐고 (싱가포르에서 헬퍼는 법적으로 2년에 한 번 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방학마다 한국 혹은 해외로 여행을 많기 다니기 때문에 우리가 없을 때 헬퍼도 휴가를 맞춰서 가주면 좋으련만 학기 중에 2주를 넘게 비운다니 골치가 아팠다. 고민이 안 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회사원도 본인이 필요할 때 휴가를 내지, 고용주가 휴가를 갈 때 휴가를 맞춰서 내지는 않는다. 물론 법적으로도 아직 시기가 안되었으니 연말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가장 많이 고생을 하게 될 남편의 허락을 받아 오늘 헬퍼의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고, 행복해하는 게 눈에 보이니 나도 마음이 좋다.


헬퍼 없는 2주를 걱정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한심하다. 인간이 원래 편한 쪽으로는 적응이 빠르다고 핑계를 댈 수밖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