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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23. 2015

진짜 '쎈' 언니들을 소개합니다

목숨 바쳐 나라 구한 언니들

  걸크러쉬라는 말이 유행이다. 같은 여자끼리 보면서 '오 멋있다..'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동경하게 되는 언니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단어들이 양지로 올라올 때 대체 그러하듯이 느낌이 좀 일반화됐다. 그래선지 대체로 소위 '쎈 언니들'이나 카리스마 있는 여자들 뒤에 더 따라붙는 말 같다. 언프리티 랩스타도 한몫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전부터 그런 '쎈' 언니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가끔은 기가 세다든지 드세다든지 하며 별 이유도 없이 후려치기 당할 때도 있고, 실제로 본인이 표독스럽게 굴어 주변에서 치를 떠는 경우도 있다. 역사에 기록될 땐 주로 '악녀'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 그렇지만도 않다. 역사가의 붓끝이 덮을 수 없는, 그런 명암에 덮이기엔 너무나 고고했던 진짜 센 언니들을 소개한다. 사실 입에 붙은 말이 언니들일 뿐, 이들은 다 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모두가 아는 이름이다. 그래서 국정 교과서로 한동안 난리가 날 때 괜스레 이리저리 불려 다녀야 했던 이름- 유관순. 식민지가 되어 버린 조선은 어두운 땅이었지만 천안에서 태어난 이 소녀의 마음까지 어둡게 덮지는 못했다.


  어릴 때부터 당차고 다부진 성격이었던 듯하다.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당돌하게 찾아가 문을 두드릴 배짱도 있었다. 결국 선교사 주선을 통해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애국심마저 투철했던 이 야무진 소녀가 마음 잡고 공부만 하기에 시국은 너무 어지러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화의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유관순이 고등과 1학년이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그 만세의 행렬을 눈 앞에서 보며 유관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관순은 머리도 좋았지만 행동 추진력도 못지않았던 것 같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 학생들이 다쳐선 안 된다고 교문을 막았고 학생들은 항의했다. 그새 유관순은 다른 학생들 몇몇과 함께 담을 넘어 만세 행렬에 합류한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술국치 전부터 사법권, 군권 등 조정의 힘을 차례로 빼앗으면서 일본은 조선에 무자비하게 들어왔다. 1919년은 그동안 눌려 있던 민족의식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조선인들의 피가 끓는 만큼이나, 허둥지둥 놀란 일본인들의 대처 또한 살벌했다. 이화 학당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유관순은 독립 선언서를 갖고 아예 고향 천안으로 내려간다. 인근의 교회와 학교를 다니면서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운동을 준비한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교회 전도사 조인원, 김구응 등 동네 어른들과 함께 장날인 4월 1일을 기점으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소식을 알리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뿐 아니라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것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꼼꼼하게 준비했다. 마침내 3월 31일 밤 곳곳에 횃불이 올랐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대는 당황했지만 이내 총검을 휘둘렀다. 아버지 유중권도 어머니 이씨도 이때 학살당한다. 눈앞에서 총칼에 무너지는 부모님을 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눈물겨운 장면이지만 눈물로 주저앉을 겨를도 없었다.


  숙부와 동네 어른들과 함께 빈사 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들쳐업고 유관순은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한다. 유관순은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기구하게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영명학교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친오빠 유우석이었으니, 가족 내에 신념과 뚝심이 분분히 흐르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실제로 4월 1일 만세 운동에는 아버지와 숙부뿐 아니라 증조부까지 참여했을 정도니 알 만하다.



  서울로 압송되어 간 유관순은 법정에서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고 7년 형을 언도받는다. 감옥 안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치는, 절대 기가 꺾이지 않는 그 모습에 일제는 더욱 악랄한 고문으로 유관순을 짓밟으려 한다.


  지금도 서대문 형무소에 남아 있는 옥사에서도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차마 서대문 형무소에 모형이나 안내판으로 기록해 두지 못할 만큼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라 알려진 위의 글에 나온 내용이 거의 그대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고문'이란 단어가 적절할까? 그냥 단숨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갖은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을 만큼 끔찍했다.


  기껏해야 열여섯에서 열일곱 즈음. 평온한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을' 나이였을 소녀는 열사가 되었다. 가장 진솔한 내면의 고백이었을 기도는, 나약하고 부드럽기보다 전장에 나가는 장군의 그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세 운동을 하루 앞두고 얼마나 떨리는 마음이었을지.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 1919년 3월 31일                        (출전; 독립기념관 어록비/ <열사의 노래>, 김정민)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그렇게 살해당한 유관순 열사의 말과 행동은 10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서슬 퍼렇다. 그건 결코 물리적인 힘으로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영원히 살아 있을 모습이 되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자부심이 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해보다 100년가량 전, 인도에도 유명한 여자가 태어났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훗날 '잔시의 라니(잔시의 여왕)' 혹은 '라니 락슈미 바이'로 불린다. '마니까르니까'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본명을 부르기보다 애칭을 부르는 인도 문화상 평소에는 '마누'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이 아이는 4살에 어머니를 여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그 구역의 1인자인 재상을 모시는 일을 해서, 재상의 애정까지 한 몸에 받는 풍족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특이하게도 사격, 기마, 펜싱까지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교육 덕에 아이는 이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란 마누는 '잔시'라는 이름의 토후국 왕과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락슈미 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토후국을 설명하려면 영국이 인도에 발을 들이는 과정은 일본이 조선을 삼킨 것과는 많이 다른 방식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접근 방법도 달랐지만 '단일 민족'을 위시한 조선이라는 나라와, 각 도시 각 지역이 제각기 다른 민족 다른 색깔을 갖고 있던 인도라는 나라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토후국이란 특이한 형태의 지방 소국이 형성되었는데, 영국의 직접 지배를 받는 대신 지방 군주가 다스리나 실상은 영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형태였다. 즉 토후국의 왕비란, 본인이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안락한 권력에 파묻혀 조용하게 일생을 보낼 수도 있는 자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의 격랑은 이제 고작 이십 대 초반이었던 여자가 단숨에 시대의 심벌로 떠오를 만큼 강한 파도로 다가왔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생후 4개월의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입지가 위험해지기 시작한 건 왕이 죽은 후였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 된 락슈미 바이는 급하게 남편 사촌에게서 아이를 입양해 온다. 애초부터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 차곡차곡 준비하며 권력을 잡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부랴부랴 입양한 아들을 데려오더라도 동인도회사는 호락호락하게 그 힘을 키워줄 마음이 없었다. 호랑이 새끼가 될 지도 모를 왕을 키우느니, 지금껏 봐온- 이제 과부가 된 이 여자에게 명목상의 왕권을 넘겨주는 게 그들에겐 수월했을 거였다. 실제로 '호랑이'로 자라 영국과 끝까지 싸운 다른 토후국 마이소르의 군주를 생각해 볼 때 이는 동인도회사 입장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하여 입양한 아들의 왕위 계승권은 부정당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 락슈미 바이는 얼마 간의 연금과 함께 왕궁을 떠나라는 말을 듣게 된다.


  쉽지 않은 날들의 시작이었다. 이 여인은 그때도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몰락한 왕비였을 뿐인 이 여자를 감히 도와줄 만큼 배짱이 상당하고 왕권에 충성하는 백성은 없었다. 그보다는 영국의 비위를 거스르게 될까 두려워했다. 락슈미 바이의 삶은 그렇게 별 의미 없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1857년, 우리가 '세포이 항쟁'이라고 기억하는 일이 폭탄처럼 터졌다.


  시작은 작은 소문이었다. 당시 벵골 지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용병을 세포이라 불렀는데, 세포이들에게 지급되는 탄약통에 소나 돼지 기름으로 방수 처리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그전부터 세포이들의 불만은 테트리스 블록처럼 쭉쭉 쌓이고 있었다.


  애초에 '용병'이니만큼 봉급과 처우 문제, 또 사티(남편이 죽으면 과부를 불태우는 관습)가 금지되고 부대마다 선교사가 배치되면서 기독교 개종을 강요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등 다양하게 뭉쳐 있던 불만에 탄약통 문제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


  대부분 힌두교도나 무슬림이었던 이들이기에 자기들이 신성시하는 소 혹은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의 기름이 묻은 탄약통을 입으로 뜯으라는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담배 냄새가 싫은 사람에게 담배 연기를 맡게 한다든지 하는 기호 수준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일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렇듯 종교는 명분이고 그 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게 맞겠지만... 아무튼 시작은 그랬다.


얇은 만화책으로 그려낸 락슈미 바이 위인전. 인도 동네 서점에서 50루피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만큼 친숙한 위인이다.


  무기력한 귀족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 락슈미 바이를 어릴 때 배운 기마와 사격의 세계로 이끈 것도 이 세포이 항쟁이었다. 이때부터 락슈미 바이는 스스로를 '잔시끼 라니'라고 부른다. 잔시의 여왕.


  이전까지는 다소 허둥지둥 맡겨지는 대로 내몰려 사는 것 같아 보였던 락슈미 바이는 이때부터 군대를 조직하고 세포이 항쟁 부대와 손을 잡는다. 인도 북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릴 만큼 영토를 회복하기까지 해서,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투 중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유관순을 보다가 락슈미 바이를 보면 좀 맹숭맹숭한 감이 없잖아 있다. 신념으로 똘똘 뭉친 유관순은 시작도 끝도 한끝 타협하는 일 없이 꼿꼿했으나, 락슈미 바이는 시대에 등을 떠밀렸을 뿐 화끈한 혁명가와 뜨거운 열사까진 아니었다. 그러나 간디와 네루로 대표되는 인도 독립 운동사에서 락슈미 바이는 분명 빛나는 존재다. 유관순을 보며 서슬 퍼런 꿈을 꾸는 우리처럼,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락슈미 바이의 초상을 보며 가슴 뛰고 있을 테니.




  그리고 제국주의의 발톱에 맞섰던 위의 두 사람과 달리 그보다 한참 전에 활동한, 두고두고 쎈 언니의 표본으로 내려오는 분이 계셨으니... 잔다르크다. 생몰연도를 기준으로 400년 이상 앞섰지만 전투 중에 적군에 의해 사망한 위의 두 사람과 달리 가장 억울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기도 하다. 아군 손에 죽었으니까.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이 백 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풀어져 있고, 흑사병의 피해가 아직 완전히 역사 뒤안길로 가시지 않아 안팎으로 어수선한 때였다.


  '플란다스의 개' 때문에 플란다스라는 발음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플랑드르 제후국은 양질의 양털이 생산되는 곳이었고, 이 지역을 장악하면 북유럽 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자연히 주변국들 모두 이 지역을 탐냈다.


  플랑드르 지방을 두고 시작한 싸움은 훗날 사가들이 붙인 그 이름따나 참 오래 이어졌다. 이미 영국이 프랑스 영토까지 들어와 몇 번이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30년 가량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프랑스에게 오를레앙은 여기마저 뚫리면 쭉 뚫리는 곳- 다시말해 최후의 요충지였다. 이 중차대한 상황에서 여길 지킨 건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였다.


  잔다르크는 동레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집안 소유의 땅도 있었으니 영 가난한 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작 열두 살 혹은 열세 살쯤 되었을 때 유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버리고 잔다르크가 분연히 일어난 이유는 '환상'이었다.


  환상을 보았다는 말이 야사도 아니고 정사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보니 잔다르크 본인에게 정말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영국군을 몰아내고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잔다르크는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열여섯 잔다르크는 피신해 있는 프랑스 왕을 방문하고자 끈질기게 문을 두드린다. 노력이 가상했으니 한번 들어라도 준 건지 아니면 열여섯 소녀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어서였는지, 마침내 잔다르크는 자기가 구해야 할 샤를 왕세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종교가 중요했던 시기였으므로, 신학자들을 동원해 잔다르크의 종교성을 판단하는 과정이 신원 조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잔다르크는 그게 편견이었든 합리적인 사고였든간에 실제 전투 기록으로 다 부수어 보였다.


  사실 소녀가, 열두세 살에 계시를 받고 이제 열대여섯 살이 된 소녀가 전투를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하는 주장은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다. 그냥 깃발을 흔들며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합리적인 의구심이지만 잔다르크가 당대에 갖는 역사적 위치를 박탈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사실 성경에도 실린 이스라엘 역사의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멧돌로 때려눕히는 기록도 있고, 신라의 화랑들에 대한 기록이나 이성계가 짓밟은 왜구 아기 발도 등 어린 나이에 무공을 세우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설령 깃발 흔들며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만 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프랑스의 상황에서 잔다르크를 기점으로 전세가 뒤바뀌었다는 걸 생각할 때, 정사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잔다르크의 영향력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결국 잔다르크가 계시를 받고  꿈꿨던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까지 치렀지만, 이제 위기에 처한 건 프랑스가 아니라 잔다르크였다. 계속되는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하던 잔다르크는 포로로 잡히고, 이내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말이 종교 재판이지 사실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셈이다.


  재판은 매우 불합리했다. 재판 기록 날조, 증거 날조 등 온갖 꼼수와 비리가 횡행한 더러운 재판이었다. 잔다르크는 조목조목 변론을 펼쳤지만 갖은 회유와 압력으로 이리저리 조작된 재판에서 변론이 의미 있을 리 없었다.


  오랜 재판 기간 동안 감옥에서 구타와 폭행까지 당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잔다르크는 이단 판정을 받고 화형 당했다. 화형 당하는 잔다르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르느뵈의 위 그림에는 십자가를 받아 들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실제로 저게 잔다르크의 마지막 부탁이었다고 하니 씁쓸하다.


  잔다르크는 죽었지만 문화의 숨결을 타고 몇 번이나 되살아났다. 락슈미 바이가 영화, 드라마, 게임에서도 천편일률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라면, 세계적으로 더 유명하기 때문인지 잔다르크는 보다 다양한 나라에서 더 많은 모습으로 펼쳐진다. 버나드 쇼의 희곡에도 나오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도 등장하고, 밀라 요보비치가 여전사처럼 멋지게 출연한 영화에도 나오며,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도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나오고, 심지어 장지연의 <애국 부인전>이라는 애국 소설에 나와 민족을 이끄는 여성의 모습으로 구한말의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불 일듯 하는 애국심을 말하기엔 좀 촌스러운 시대다. 애국심이 모자라서 문제가 생기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땐 아니었다. 마음에 불 피운 애국심을 말로 행동으로 꺼내다 죽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저들은 끝까지 싸웠다. 죽는 순간까지, 너덜너덜해지고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싸웠다.


  인터넷상에 여성 혐오와 그에 대한 반박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존재와 성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될 때,

  걸크러쉬가 유행어가 되다 못해 노래 제목으로까지 나올 때,

  그럴 때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이 정장에 스틸레토 힐 신고 영자 신문을 읽는 모습이나 스냅백 쓰고 랩 하는 모습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나도 다른 수많은 여자들처럼 이 사회에서 드세다는 말 심심찮게 들으며 컸지만, 기왕 그런 말을 들을 거라면 파란 신념을 끝까지 파랗게 고수하는 방향으로 드세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기 세다고 욕을 먹어도, 저러다 시집 못 간다고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들어도 코 웃음 칠 수 있겠다. 그냥 주변을 마구 할퀴어 대는 표독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이고 싶다. 바른 사람이고 싶다. 저들 앞에 나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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