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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06. 2016

일그러진 야망 뒷면의 아이

아이는 괴물의 발자국을 남겼다

  언젠가 한 번은 꼭, 그러나 꼭 한 번만 가 보고 싶은 곳들이 있다. 기분 좋은 관광지보다는 오히려 조금 어둠 뒤편에 있는 곳들이다. '마루타'의 장소였던 731 부대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내겐 그런 곳들이다. 사실 나는 서대문 형무소를 혼자 걷는 것만으로도 많이 떨리는지라 혼자 걷기는 좀 무섭지만, 기회가 된다면 숙연한 침묵 속에서 걸어 보고는 싶다.


  아직 가 본 일이 없음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면에 쓰여 있다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하나,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라는 말은 머릿속에 생생하다. 낭설이지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731 부대 벽면에는 "역사를 잊는 것은 배신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고 한다. 배신이 난무하는 시대,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일그러진 야망들이 곳곳에 꿈틀대는 시대라면 그런 야망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비참한 것인지 뜯어볼 필요도 있다.


  그래서 야망의 상징과도 같은, 여전히 악몽과도 같은 그 이름 아돌프 히틀러를 뜯어보려면- 사실 그의 부모님부터 보아야 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사실 부모가 눈물로 자기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배우고 애쓸 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자기 출신과 가족들에 대해 알려지는 일에 대해 특이할 정도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자기 과거를 알리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으며, 심지어 자기 젊은 날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적당한 거짓과 미화로 그럴 듯한 모습을 지어내려 애썼다. 부모님의 고향 도시를 보존하고 동상을 세우는 게 아니라 아예 군사 훈련장을 만든다고 뒤집어엎어 버렸다. 그러나 그가 자기 젊은 날을 어떻게 미화했는지는 그 삶의 행적을 따라가며 하나씩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히틀러의 부모님은 정확히 23살 차이였고 그다지 멀지 않은 친척 사이였다. 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데다가 술꾼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매우 마음 약한 사람이었는데 아이 셋을 연달아 잃으면서 더욱 약해졌다. 권위적인 술꾼 아버지가 귀가 후 폭력을 행사하는 건 별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병약한 어머니는 아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고, 어린 아돌프의 성질도 만만찮아서 아버지와 계속해서 부딪히는 아이였다.


  술집에서 잔뜩 취한 아버지를 어르거나 소리치며 일으켜 집으로 돌아온다는 건 소년에게 꽤나 곤란한 일이었기에, 이후 히틀러가 금욕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철저하게 술을 멀리한 이유를 여기서 찾는 사람도 많다. 사실 가족들이나 그와 관련된 것에 대해 히틀러는 거의 결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는 말이 맞을 것도 같다.


  아무튼 그런 집안 분위기가 명랑할 수는 없었다. 무력한 어머니의 모성애도 따뜻하다기보다는 마치 협박을 받아 손을 덜덜 떨며 움직이는 인질의 행동처럼 느껴질 만큼 기계적이었다. 권위적인 술꾼은 이웃들과도 많이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이사라는 방법으로 회피를 했다. 하여 히틀러의 어린 시절은 잦은 이사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자연 친구들을 사귀지도 못했다. 집 안이든 밖이든, 히틀러를 둘러싼 모든 세계에 애정이란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보고 배운 것은 아이를 권위적이고 자존심이 세며 사람들을 정복하려 드는 소년으로 길러냈다.


유년기의 히틀러

  히틀러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그야말로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는 삶이었다. 이후 <나의 투쟁>에 기록된 말들은 사실 모조리 미화뿐인데, 예를 들면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대단한 역사의식이라도 얻은 것처럼 쓰여 있지만 사실 역사 시험에서 낙제를 할 만큼 점수가 낮았다. 똑똑하긴 했지만 공부를 진득하니 할 상황도 마음도 아니었던지라, 실제로 유급을 밥 먹듯 하기도 했다. 자신은 화가 지망생이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고 공공연히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한 건 그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보고 콧대를 세운 것뿐 실제로 예술가가 되겠다고 뭘 한 건 없었다. 다만 그런 막연한 장래 희망들을 들이대며 어머니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게 일이라면 일이었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더욱 허약해진 어머니지만 아등바등 애를 써서 아들의 물질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언젠가 히틀러가 음악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사 주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쌈짓돈이라도 다 풀어내어 준 셈이다. 아이가 크면서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자라면서 자기 재능을 발견하는 일도 많은 데다가 부모가 그 자식을 뒷바라지해주는데 그게 뭐가 나쁘겠냐만- 문제는 히틀러의 그 모든 '꿈'들은 그저 자기 경멸에서 비틀거리는 소년의, 그리고 청년의 도피처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점을 간파하며 아이를 키울 만큼 어머니가 지혜롭지 못했고 오히려 그런 아들에게 끌려다녔다는 점이다. 시골에 갔다가, 비엔나에 갔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허무한 세월은 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까지 예술가가 될 테니 비엔나를 다시 보내달라고 말할 만큼 뻔뻔스러웠다.


  히틀러는 어머니의 죽음에 임박해서야 어머니를 좀 챙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보다 이제 뒷바라지를 해 줄 이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 컸던 것처럼 보인다. 그 후로도 히틀러는 결코 미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아 연금을 받고 그림을 그려 엽서를 판다든지 하는 수익이 나쁘지 않았으므로 그럭저럭 살았던 모양이다.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이 시기가 그에게는 인간 군상과 그 심리를 관찰하는 길 위의 삶이었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올곧은 애정이나 따뜻한 마음 같은 걸 주고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였으므로, 애정 관계에 있어서도 결벽 같은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가족들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 자르고 냉정하게 뒤돌아선 후로, 그가 가족들에  관련해서 한 일이라곤 오직 자기와의 연을 덮는 일뿐이었다. 그러면 우정이나 연애에 있어서는 어떨까. 한 세기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이 독재자의 여인은 누구인지 많은 호사가들이 궁금해했지만, 그래도 실체가 명확하게 잡히는 가족사에 비해 그의 연애사란 너무나 단출하여 보잘것없을 정도였다.


  조카뻘이기도 했던 겔리 라우발을 히틀러가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가 보인 사랑 표현이라곤 끝없는 집착 정도였다. 결국 겔리는 자살하고 그 후로 히틀러는 고기를 보면 그 시신이 생각나 먹을 수 없다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집착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 옆에선 어땠을까? 자신을 사랑하고 평생 곁에 있었다고 해서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끈덕지게 그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며 그를 도왔던 에바 브라운은 전쟁의 패색이 완연해진 날, 히틀러와 자살하기 직전에서야 에바 히틀러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원하던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으나 그건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전장의 동료에 대한 예우 정도로 느껴진다. 그의 삶에 애정 어린 관계란 어느 하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이 모습 뒷면에도 그만큼 비인간적인 모습이 가득했다.

  입대와 입당, 탁월한 연설 실력으로 차곡차곡 당내 입지를 높여가고, 뮌헨 봉기에 실패하면서 투옥된 와중에 쓴 <나의 투쟁>과, 그 덕에 얻은 인기와 지지로 당을 재건하려는 찰나에 경제 대공황이 온 세계를 뒤덮으면서 지지도가 높아지고, 총리가 되어 반대파를 잔인하게 짓밟고, (여기에는 고문과 감금, 불법 재판 등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그 유명을 달리하려는 혼란한 시국의 파도를 타고 총통의 자리에 오르고...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차츰 제 자리를 확장해 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은 이 시대의 역설을 고스란히 담는 문구가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 <나의 투쟁>은 나약하고 감정적으로 불구와도 같았던 젊은이의 재능을 마치 예술가의 고독인 듯 미화해 담아냈고, 이후총리가 된 히틀러가 반대파를 짓밟을 때는 고문과 감금, 불법 재판까지도 동원되었다.


  히틀러는 카리스마 있고 언변이 좋은 정치인이었으며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생각하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인종 청소라는 표현 하나만 생각해도 그건 결코 합리화될 수 없는 업적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공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그나마도 공에 비해 너무 큰 과 때문에 재조명되기 어려운 인물이라 본다.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쳤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입에는 청산가리를 넣고 동시에 권총으로 머리를 겨누어 실패 확률을 낮추려는 치밀함을 보였다. 연합군 손에 잡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아는 입장에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도였을 것이다. 시체가 불타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그 후로도 히틀러가 살아 있다든지, 두개골을 조사해 보니 여자의 두개골이었다든지 하는 음모론이 계속되었다.



  언변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사람이기는 했다. 지워지지 않는 근 발자국을 역사에 남긴 한 사람이란 으레 유능하듯. 그러나 그가 남긴 발자국은 역행의 발자국이었다. 그 발걸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이웃에게 밀고당하고,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고 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었다. 저항하다 죽고, 방조하다 죽고, 태생 때문에 죽고, 가만히 있다가 죽었다. 물론 히틀러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그를 변호해 주지는 못한다.


  히틀러라는 사람이 자아낸 그 큰 어둠도, 한때는 어린아이였다. 제대로  사랑받아 보지 못한 어린아이가 괴물로 자랐다. 무분별한 폭력도 무분별한 뒷바라지도 모두 독이었다.


  이따금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된 네오나치들을 보곤 한다. 이 글은 오래전 고등학교 때 블로그에 올린 글을 다시 쓴 것인데, 그때 당시 놀랍게도 가끔 네오나치들이 변방의 내 블로그까지 와서 댓글을 달았다. 히틀러 멋있다고. 히틀러가 동물 애호가였다든지 아우토반을 만들었다든지, 심지어 '그나마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죽였으니 덜 나대는 거다'라는 댓글까지도 달렸다. 대단한 홈페이지나 큰 커뮤니티가 아니라 고작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만 보았는데도 그 정도였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은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드러난다. 우리는 팩트뿐 아니라 콘텍스트를 함께 읽어야 한다. 그가 동물 애호가였던 것도 맞고, 최초의 동물 보호법을 그가 제정한 것도 맞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벌레 보듯 한 그가 동물을 아꼈다는 건 내 눈엔 더 소름 끼치는 일일 뿐이다. 라디오 보급으로 라디오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언론 장악을 잘 했다는 뜻이고, 아우토반을 그가 만들었다는 건 나치의 훌륭한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재임하기 전부터 이미 아우토반 건설 중이었다고 한다. 다만 완공 시점이 그의 임기 중이었을 뿐이다.


  백번 양보해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한들, 뭐 달라지나? 식민사학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이  우리나라 철도를 부설해 주었으니 우리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이다"인데, 다른 나라가 딴 철도 부설권까지 구입해 가며 일본이 조선 땅에 철도를 부지런히 깐 이유는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철도는 그저 수탈과 전쟁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철도 짓느라 죽은 사람과, 그 철도 따라서 보급된 군량미 먹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느 누가 그걸 근대화라는 말로 덮을 수 있을까. 기술의 근대화가 사회의 근대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얄팍한 포장지로 아무리 덮어본들, 정신 상태가 근대화되지 못한 자들이 끌어들인 기술의 근대화는 더 큰 해악을 낳는 도구일 뿐이다.


히틀러는 타임지가 선정한 1938년 올해의 인물이었다.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그 뒷면에 서 있는, 울분에 찬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씩씩거리는 어린아이를 보아야 한다. 끌어안고 위로하고 잘 가르쳐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100년 전의 아이를 안아줄 수 없는 일이다. 일그러진 야망에도 그림자가 있다. 우리가 히틀러를  뜯어보며 배워야 하는 건 그거다. 히틀러의 선동적인 카리스마에 열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뒷면이 얼마나 유약하고 초라한지를 보는 일이다. 끌어안아 줘야 할 그림자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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