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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Aug 20. 2023

2003, 2004, 2005년

2003년                    


책으로 만들어진 벽이 계속 그대로 있는데, 돌연,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책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화장기 없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유자가 그 안에서 나온다.     


유자

카페 게시판에 학원 정보 좀 떴나……. 어, 수강료 또 올랐어! (머리 벅벅 긁으며) 이 돈벌레들! 에이씨, 패스! 아, 문제집 사야 하는데. 아냐, 전에 것도 다 안 풀었지? 아, 재작년 건데. 아, 몰라! 공부 안 돼! PC방 가까? 에이, 아니다, 그것도 귀찮다. 디시인사이드 가서 악플이나 달자……. (마우스 클릭하고 키보드 두드리며) 뭐야! 왜 안 열려! 왤케 느려! 아씨!


유자, 마우스와 키보드를 격하게 탕탕 두드리는데,     


재남(icq)

유자 씨?

유자(icq)

거긴 밤 아니에요?

재남(icq)

프로젝트 땜에 밤샘.

유자(icq)

고생하네요.

재남(icq)

스톡옵션도 받았어요. 약간이지만. 공부는, 잘 돼가요?

유자(icq)

그냥 그래요.

재남(icq)

홧팅입니다. 유자 씨!

유자(icq)

홧팅요? 재남 씨, 공무원 경쟁률 모르죠? 나 이번에도 또 안 될 거예요.

재남(icq)

그러면, 재취업할 생각이에요?

유자(icq)

재취업? 누가 뽑아준대요?

재남(icq)

유자 씨.

유자(icq)

됐어요! 그만해! 의미 없고 영혼 없는 격려는 폭력이에요!

재남(icq)

나한테, 화가 났어요?

유자(icq)

답답해서……. 물정도 모르면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재남(icq)

그렇지만, 회사 나간 것도, 공무원 시험 준비한 것도, 결국 유자 씨 결정인데.

유자(icq)

아, 네. 맞아요.

재남(icq)

그러니까, 결정을 내리셨으면 힘들어도 참아야지 징징대면…….

유자(icq)

뭐? 징징? 지금 나한테 징징댄다고 했어요? 그래요! 나는 한심하고 전략 없는 징징이야! 다 내 탓이야!

재남(icq)

나중에 얘기할까요?

유자(icq)

아니, 하지 마! 연락하지 마요! 짜증만 나니까!


유자, 키보드를 바닥에 쾅 던지고 씩씩거린다.     


유자

(컴퓨터 노려보며) 인재남 너랑은 이제 끝이야. 재수 없어!     


그대로 컴퓨터를 확 꺼버리는 유자. 잠시 씩씩거리며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유자(Na)

재남 씨는 더 이상 icq를 안 보냈어요. 아니, 한 번 보냈는데, 내가 보란 듯이 씹었어요. 난 왜 이럴까요? 정말 쓰레기 같은 짓인데! 내가 너무 부끄러워요. 한심해요. 하지만, 너무 한심하니까, 재남 씨한테 미안하다는 연락조차 못 하겠어요. 얼마 안 돼서 그런 생각조차 희미해졌어요. 난 아주 저급해졌어요.     


유자,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2004년                    


유자가 한층 더 폐인 행색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웅얼거린다.     


유자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수석 합격? “공부는 딱 1년만 했고 운이 좋았어요.” 쳇! 뻥 치고 있네! 그 전에 3년은 쭉 기본서라도 읽었겠지! 이 년은 또 뭐야? “의사 남편의 격려로 공부에만 전념해서 합격할 수 있었어요.” 야! 공부만 하니까 척 붙었지! (전화가 오면 받고) 아뇨. 저 안 나갈 거예요. 독서실 총무 안 할 거예요. 저도 공부만 하고 싶다고요!     


전화를 끊자마자 키보드 앞에 엎드려 버리는 유자.     


유자(잠시 뒤 고개 들며, Na)

한심해요. 방구석에서 남들 욕하고 질투하면서, 못난 사람이 되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요. 봐요. 닷컴들이 다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업그레이드됐어요. 거기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뭐랄까, 피닉스처럼 잿더미 위에서 날아오르는 거 있죠? (모니터 보고) 아이, 피오? IPO가 난리라고? 어느 회사? 구글?!     

커다란 화면으로 구글의 IPO 현장이 나타난다. 전광판에 뜬 숫자가 올라가면, 다들 환호하고,


앵커(E)

구글 주가가 상장되자마자 놀라운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제2의 닷컴 전성기가 시작되는 걸까요? 스톡옵션을 보유한 구글 임직원들은 돈방석에 앉게 됐습니다!     


암전. 어둠 속에 울리는, 유자의 음울한 목소리.


유자(E)

어쨌든,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에는 붙겠지, 나도.     


2005년                    


계속된 어둠 속에서,


멘트(E)

아쉽지만 귀하는 떨어졌습니다……. 떨어졌습니다……. 떨어졌습니다. 네, 또 떨어졌습니다. 다음에도 떨어질 것입니다.

유자(E, Na)

내가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세상은 혁명 중이었어요. 넥스트스텝 같은 오타쿠 OS를 만들었던 잡스가 애플을 재탄생시켰어요. 은둔형 대학생에 불과하던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설립했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까지 나오더군요. 그리고, 구글! 아, 구글! 말해 뭣 해요? 거긴 날아다녔어요.     


유자가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온다.


유자(Na)

반면 나는, 몸을 세우고 걷지도 못 해요. 세상이 너무 현기증이 나서, 저 위의 세상은 너무 높아서, 서서 걸을 수도 없어요.     


무대 반대편에서 역시 누군가가 기어들어온다. 30대의 광수다.

두 사람, 묵묵히 갈 길 가다가, 중앙에서 교차할 때,


유자

(고개 돌려 알아보고) 어?

광수

(역시 알아보고) 아!

유자

왜 그러고 있어?

광수

바닥을, 기는 중이거든.

유자

나도 그런데.

광수

아! 하늘은 높은데, 우린 참 비참하구나.

유자

여기가 바닥이 맞을까?

광수

그래야지. 그러길 바랄 수밖에.

유자

우리가, 이번 생에, 이 바닥을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광수

아마 혼자라면 힘이 많이 들겠지만.

유자

둘이라면, 할 수 있을까? 우리, 함께 해볼래?

광수

바라던 바야!     


광수가 엎드린 채로 팔을 뻗어서 유자의 팔을 붙잡는다.

유자도 광수의 두 팔을 붙들고,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키는 두 사람.

그리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서 무대에 앉는다.

잠시 뚫어지게 보다가, 확 끌어안는 두 사람. 동시에 결혼행진곡이 울린다.



혼자 아닌 둘이 된 두 사람, 과연 저 위로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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