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졔 Oct 11. 2021

내일부터 다시 출근합니다.

컴포트 존을 벗어나

서른셋. 무턱대고 더 이상은 이렇게 지내고 싶지 않아 따뜻한 봄 햇살의 응원을 담뿍 받으며 상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긴 고민 없이 퇴사했다. 이직 고민은 회사 다니면서 하는 거라는데 그런 공식이나 일반적인 조언 같은 건 귓등도 못 스쳤다. 쉼과 비움, 새로운 채움이 절실했다.


정말 좋아했던 일과 조직을 떠난 지 공식적으로 5개월,  (휴가를 사용한 기간 등을 고려해서) 비공식적으로는 6개월이 지났다. 처음 1~2개월은 일에 매몰되어 등한시했던 내 일상을 다시 세우는 시간을 보냈다. 청소를 했다. 집 안 구석구석 눈에 띄던 지저분함들을 애써 외면하며 피곤을 털기 위해 누워 자기 급급했던 시간 동안  나중으로 미뤘던 정리를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전선도 정리하고, 빔 프로젝터도 천장에 달고, 오래 입지 않았던 옷을 골라내어 기부했다. 운동도 시작했다. 무너진 코어를 세우고 생각 없이 땀을 빼는 시간을 가졌다. 회사 후배가 꼬셔서 국제개발협력과 관련한 자격증인 ODA자격증 시험도 살짝 공부했다. 합격했다. 퇴사로 인해 약간의 불안한 모먼트에 주어진 작은 성공의 경험들은 내가 조직의 이름 없이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되었다.


3개월 차엔 (사실 올림픽 시청이 주된 일과였지만) '내가 커서 어른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한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이것저것 험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평일 낮에 경기가 열리는 때면 회사에 다니는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배구 경기를 라이브로 꼬박꼬박 챙겨봤다. 대신 내가 원하는 때에 네이버 커넥트재단과 모두의연구소가 진행하는 '모두를 위한 파이썬(PY4E) 스터디 1' 합격해서 기초 파이썬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개발자로 전직을 생각하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누가 못하거나  한다고 뭐라고 하는  아니었지만 연경 언니의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덕에 앉은자리에서 여섯 시간을 끙끙거리며 가위바위보 게임 같은  만들었다. 친구가 시작한 글쓰기 모임에도 참여했다. 브런치에  글을 써봤고, 다행히도 재수 없이  번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라고 불리고 싶다기 보단 어차피  , 사람들과 글을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원이 이루어져 기뻤다. 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었던 채식 지향의 삶에 반보 정도 다가가 페스코에 머물며 비건을 지향하는 걸음도 뗐다.  읽는 모임도 시작했고, 동네 비혼 여성들의 맛집 공유 단톡방에도 들어가고, 무용하고 유용한 짓을 맘껏 했다.


그동안 입에 간간히 풀칠할 정도의 강의나 스타트업 코칭 아르바이트도 했다. 알바를 위해서 지금껏 쌓아온 일의 경험과 기록을 노션으로 정리하는 날도 며칠 가졌다. 기록되지 않고 방치되었던 경험이 쌓여 정리하는 것에 2-3일이 꼬박 걸렸다. 그렇게 정리한 이력으로 콜드 메일을 보내며 소소한 강의를 따내기도 했다. 내 노동의 값을 얼마로 쳐야 할지 졔졔 사용 가격을 정리하면서 일과 생활에 대한 기준도 세워보았다. 가볍게 프리랜서이고 싶었는데 (강사나 컨설턴트 같은 일을 하다 보니 더 그랬던 걸까) 한국 사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프리랜서를 프리랜서로, 나를 그냥 졔졔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길래  개인사업자도 하나 만들어두었다. 대표할 것이 나 자신밖에 없는 깡통 대표가 되었다. 사업자등록을 하면서는 혹시 몰라 출판업 등록도 해두었다. 강의도, 코칭도 하다 보니 기고 제안도 들어와 스타트업과 관련한 리포트도 작성을 시작했다. 고된 작업이지만 나 스스로도 공부하면서 하는 재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4~5개월 차부터는 조금씩 같이 일해보면 어떻냐는 제안들이 생겼다. 추석도 있고,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세 곳에서 온 최종 제안을 두고 고민하는 어영부영의 시간을 보냈다.


*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목적을 둔 초기 기업 A

* 글로벌 창업 지원 업무로 기존에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매출 압박도 없을 재단 B

* 대기업, VC의 출자를 통해 초기 조직이지만 백 명 이상의 직원을 둔 금융권 기업 C


각각 매력 있는 조직들이었고, 모든 일이 다 매력 있을 것 같고 모든 조직이 다 각각의 장점이 있을 것 같아 이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을 보냈다. 연봉이나 처우 관련한 협상은 또 어떻고. 성장과 안정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익숙한 것을 할 것이냐, 새로운 일을 할 것이냐라는 질문과 조직 성장의 폭 측면에 질문을 던졌을 때 B는 안정지향 시, C는 성장지향 시 선택했을 때 더 좋을 옵션으로 느껴졌다. 안정은 정말 매력적인 키워드이지만 조금 더 훗날 선택해도 좋을 옵션으로 느껴져 A, C를 놓고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다. 약 10년 간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소셜 섹터 등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 내 일의 맥락을 계속해서 가지고 갈지, 혹은 사회적 가치라는 키워드를 좀 더 광의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섹터를 경험할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A와 C 조직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어찌 보면 굳이 안 그래도 될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작성해 보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졔졔입니다.

대표님, 말씀 주시기 어려우셨을 부분까지 솔직하게 열어놓고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조건이나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등을 폭넓게 두루 살피며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바쁘신 중에, A회사라고 하는 좋은 조직, 미래가 더 풍성할 조직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면접 시간을 내주셨고 조직의 중요한 시점에 제 거취 고민을 위해 기다려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실 더 깊이 고민하기 시간이 충분치 않다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하더라도 정답이 없는 고민인지라 주신 제안에 답변을 드립니다. 이번에는 귀사와 일하는 기회를 정중히,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거절하고자 합니다.

제 깜냥이 대단하지도 않은데 짧은 시간이지만 면접 내내 흥미롭게 제 이력을 검토해주시고, 제 이야기를 오롯이 집중해 들어주시고,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같이 일해보자고 먼저 손 내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내밀어주신 손을 제가 뭐라고 잡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영 쑥스럽고 민망하게 느껴집니다.

혹여 궁금하실까 하여 말씀드리면, 처우로 인한 결정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처우를 최우선에 놓고 고민했다면 대표님께 처우와 관련한 추가 협상을 요청드렸었을 테지만, 처우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이상 더 고민해보고 싶은 지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면접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재무적, 사회적인) 임팩트의 범위와 함께, 어떤 곳에서 일했을 때 내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질 수 있을지나, 향후 커리어를 만들어 감에서 확장성은 어떠한가 등을 놓고 주로 고민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는 A지역-B지역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제 좁은 사회의 경계를 넘어서 보고 싶었습니다. 면접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회에 변화를 만들고자 했던 여러 조직의 실험과 활동이 확장성에서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었고, 그래서 어떤 지점이 ‘우리’와 대중’과 다를지, 혹은 다르지 않은데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한계가 발생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소셜 섹터가 아닌 곳의 직장인들은 어떤 고민과 시각으로 세상과 사회문제를 바라보는지도 살펴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소셜 섹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고자 합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한 편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셜 섹터의 사람들이 가진 어떠한 결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를 경험하고자 한 이 결정이 제가 지금껏 소셜 섹터의 사람으로서 고민하고 키워온 시각을 앗아가진 않을까 떨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험하되 매몰되지 않도록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운 섹터로 모험을 하러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향후 소셜 섹터로 돌아와 더 넓은 시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길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습니다.

변명이 길다 느끼실 것 같습니다. 지금 드리는 이야기들이 빈 소리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저는 시민으로서, A사의 타겟 페르소나로서, A사의 행보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n호 팬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A사와 대표님, 그리고 A사의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나갈 사회 변화를 응원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으로 답변드리지 못해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다만 오늘의 이 소식이 A사에 새옹지마가 될 수 있도록 더 좋은 분이 A사와 함께하게 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긴 시간 기다려주시고 양해해주신 여러 지점을 오래 감사히 기억하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라며,
졔졔 드림


처음으로, 소셜 섹터가 아닌 회사를 간다. 내일부터 출근을 한다.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 중 가짜 역량은 다 벗겨지고 진짜 역량만 남아 알맹이로 홀홀히 출근을 한다. '귀사를 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면 될 것을 긴긴 편지를 보내며 사실 나는 '이 섹터를 (잠시) 떠납니다. 떠나서도 잘 지내고 싶습니다. 플레이어로서는 떠나지만 시민으로서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저 구질함을 참아주신 A사의 대표님께 감사하다.


내일부터 지난 5개월의 시간을 자양분 삼아, 혹은 짧으면 8년, 길게 보면 13년인 일 경험을 뿌리 삼아 새로운 섹터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혹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랄 새로운 이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된다. 무턱대고 한 퇴사가 아니었다면 찬찬히 돌아보고 새로 채울 시간이 있었을까. 5-6개월 간의 비움이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채움에서 힘을 발하길 바라본다. 개인의 확장이 개인의 확장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회적 가치의 확장이 될 수 있도록 시민임을 멈추지 않기도 다짐하고 바라본다. 무엇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하지 않길, 스스로에게 독려한다.


아침잠 많은 내가 첫날부터 늦지 않게, 일단 오늘 밤은 일찍 자야겠다.



누구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일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확인할 수 있지만, 자신을 잃기도 한다. 양날의 검처럼 스스로에게 득이 되면서 동시에 해를 입힌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그 역할극을 하느라 힘들고, 역할이 주어지지 않을 땐 자유와 공허 속에 몸부림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역할과 역할극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일하는 평범한 삶을 꾸려나가며 자신의 역할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사이사이의 균형을 챙길 시간이다.

<직장인 A 씨>, 최혜인 (봄름)


매거진의 이전글 하찮은 당신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