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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Mar 22. 2022

슬기로운 재택근무 생활

내 몸의 리듬에 맞춰 내 몸의 요청을 듣기로 해

마감이 코앞이다. 하기 싫어 억지로 시작한 일이 속도가 붙자 기세를 몰아 쭉쭉하기로 한다. 커서가 게으르게 깜박거리지 않도록 쉴 새 없이 손을 놀린다. 흰 화면이 검은 글씨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몇 페이지만 더 채우면 완성이다. 이제는 어떤 게으름을 피워도 마감 시간에 절대 늦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분량이 된다. 손목이 찌릿찌릿 아파온다. 양 손목을 번갈아 돌린다. 주먹 쥔 손을 손목 안쪽으로 돌리자 전완근과 팔꿈치까지 긴장이 전해지다, 손목과 수직이 되도록 다시 돌리자 손가락 끝에 찌르르함이 전달된다. 이런 몸 상태라면 두세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잠시 쉬어도 좋겠지.


안경을 벗어서 잠시 책상 위에 내려 둔다. 그제서야 눈의 건조함이 느껴진다. 양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로 안구 위 뼈를 꾹꾹 누른다. 그대로 안구 밑 뼈도 눌러본다.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 조금 튀어나온 것 같다고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한다. 눈 주변 뼈를 누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눈을 마구 비빈다. 껴있는지도 몰랐던 눈곱이 검지 옆 날에 걸린다. 손가락 옆 날은 속눈썹과 부대끼며 스걱스걱 나만 겨우 들릴 소리를 낸다. 사람이 눈을 비빌 때의 엑스레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이 생각난다. 눈 건강에 좋지 않다던데. 하지만 장시간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본 눈은 한 번 닿은 손을 놔줄 생각이 없다. 눈알이 뒤통수에 닿을 정도로 더 세게 비빈다. 눈물 비슷한 것이 눈 안으로 스미며 조금씩 상쾌해진다. 이쯤이면 튀어나온 눈알이 다시 뒤로 들어갔으리라고 생각될 무렵에야 손을 뗀다. 손을 떼는 순간, 모니터의 불빛이 어둠을 뚫고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빛이 어지러이 섞인 찰나에 우주를 본 듯도 하다. 눈에 다시 들어온 모니터의 숫자는 내 감각과 전혀 다른 시간을 알려준다. 네다섯 시간이 지나 있다.


일을 시작하고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동안, 어떤 모양으로 앉아 있었는지 기억이 날 리 없다. 이럴 땐 몸이 힌트를 준다. 요추를 펴본다. 펴진다. 어깨도 펴본다. 펴진다. 몇 시간의 무게를 요추에 잔뜩 눌러 싣고, 머리의 모든 무게를 목에 전가한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한다. 허리를 벽 쪽으로 둥글려 밀어 본다. 짧을 대로 짧아진 근육들이 아주 약간 당겨지나 싶더니 굵은 스프링처럼 이내 다시 익숙해져 있는 제 자리를 찾아 짧아진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꼬아 올린 뒤 왼쪽 팔꿈치를 오른 무릎 바깥에 둔다. 왼 팔꿈치로 오른 무릎을 왼쪽으로 밀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틀어낸다. 두두둑 소리와 함께 왼쪽 등 근육이 길어지는 느낌이 난다. 반대로도 해본다. 몇 시간을 함부로 앉아 있고선 잠깐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볼 요량은 턱도 없다. 외려 왼쪽 복근의 수축으로 배가 당긴다. 허둥지둥 꼬았던 다리를 풀고 가슴 께의 빗장뼈를 천장으로 들어 올린다. 멀어진 갈비뼈들 사이로 상체에 피가 돈다.


비닐의 크기와 모양에 맞게 자라도록 강요된 애호박의 심정처럼 답답한 하체 차례이다. 발바닥은 키를 0.5센티는 크게 만들어 줄 만큼 잔뜩 부어올라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들어 올린다. 발가락을 앞으로 쭉 밀었다가, 발바닥을 바닥과 수직으로 편 채로 발가락을 몸 쪽으로 당긴다. 종아리가 가장 굵어지는 모양이 되도록 가득 당긴다. 오금이 펴지는 게 느껴진다. 적지 않은 무게를 들어 올리고 있는 엉덩이에도 힘이 들어간다. 괄약근에도 힘이 들어간다. 할 수 있는 한 한 번 더 다리를 힘주어 들어 올렸다가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털썩 내려놓는다. 하체에 피가 돈다. 발바닥에서 심장이 뛰듯 통통통 피가 튄다. 힘이 들어갔던 대퇴근에 힘이 빠진 자리를 피가 대신 차지한다. 바로 이어 좌골 뼈 사이에도 피가 돈다. 넓적다리 사이 몸의 뻥 뚫린 가운데까지 피가 돈다.


남은 원고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안경을 낀다. 한 번 억눌러 두었던 감각의 흐름은 다시 쉬이 잠잠할 생각이 없다.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어디까지 썼더라 생각하는 사이를 틈 타, 갓 준비 운동을 마친 피의 흐름은 더 거친 움직임을 갈구한다. 흐트러진 일의 맥이, 일 대신 엉뚱한 곳으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피의 흐름이 한 곳으로 수렴한다. 모른척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다시 안경을 벗고 한 몸 같던 의자에서 일어나 안방 서랍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이사할 때 열리지 말라고 내용물을 잔뜩 담은 채 테이프로 포장했던 서랍은 테이프를 뗀 이후도 잘 열리지 않는다. 서랍의 두 번째 칸을 덜컹이며 연다. 전시회 굿즈로 받은 포스트잇, 대만 여행 때 썼던 교통 카드, 안경 케이스 등의 잡동사니를 손끝으로 제치고 서랍 속 작은 카오스에서 나름의 지정 자리에 놓인 반려 기계를 한 손에 집는다. 동거인에게 카톡으로 도착 예정 시간을 묻는다. 답이 온다.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며 바지와 팬티를 내린다. 봄이 온 듯하다. 침대 안에서 바지와 팬티를 겨우 오금까지만 내려 걸쳐 두어야 했던 전과 달리 별로 춥지 않다. 이 정도 날씨라면 꼭 침대가 아니어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허리를 45도로 비스듬히, 머리와 윗등만 벽에 살짝 기대고 어느덧 고양이 털이 다시 쌓인 방바닥 위에 무릎을 세워 앉는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채 맨살에 닿은 바닥은 아직 차다. 따뜻해진 날씨에 입고 있던 티셔츠도 벗어 버리려던 마음이 가신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낭만적 요소도 제거한다. 찬찬히 어떤 광경을 떠올리며 음미할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대상 삼아 볼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는다. 다만 함부로 몸을 휘젓는 혈액의 흐름이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곧장 왼손 손바닥으로 눈에 보이는 털들을 배 쪽으로 붙여 잡는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이용해서 주변의 살점들은 제쳐 둔 상태로 목표 지점을 정확히 확인한다. 오른손에 든 기계의 전원을 누른다. 손이 파르르 떨리며 기분 좋은 약한 진동이 시작된다. 기계의 동그란 흡입구를 중요한 서류에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모서리부터 찬찬히 각도를 맞춰 클리토리스에 가져다 댄다. 기계가 공기를 매질 삼아 내는 진동 소리가 살을 매질 삼아 내는 진동 소리로 바뀐다. 손목을 꺾는 정도를 바꿔가며 흡입구가 닿는 각도를 조절한다.


이거다 싶은 각도가 들어맞자 (+) 표시가 된 버튼을 눌러 조금씩 진동의 강도를 높인다. 최대 강도로 높이니 갑자기 1.6m가 넘는 몸의 모든 감각이 1.6cm도 안 되는 한 곳으로 응집되는 것 같은 착각이 시작된다. 엉덩이로 느껴지던 방바닥의 온도도 날개 뼈에 닿는 딱딱한 벽의 감촉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다리 사이 숨겨진 신경 다발과 기계가 만나 이세계(異世界)로 향하는 입구를 만든다. 그 입구를 통해 온몸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을 즐긴다. 기계와 만난 몸의 조각 외 다른 모든 부위가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 몸의 감각에 내가 압도된다. 이대로 다른 세상으로 워프할까 싶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대로 이 감각을 즐기는 시간이 빠르게 끝날까 두려워진다. 기분과 감각과 몸의 반응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 얼른 다시 (-) 버튼을 눌러 진동을 낮춘다. 대신 기계를 더 꾹 몸에 밀착시킨다. 기계가 만드는 압력과 흡입력으로 내 몸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다. 마감이나 원고, 깜박이는 커서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이다. 오롯이 내가 곧 클리토리스이고 클리토리스가 곧 나인 것 같은 지금의 감각에만 집중한다.


기계는 같은 자극을 유지하지만 클리토리스가 흡입구와 만나는 면적은 점점 커져 온몸의 피가 쏠린다.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잔뜩 찡그린다. 미간과 함께 로션을 챙겨 바르지 않은 얼굴의 잔주름이 제멋대로 구겨진다. 조금씩 자극이 몸의 한계 수용량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고비를 넘겨야 만날 수 있는 어떤 순간을 위해서는 기계를 몸에서 떼낼 수 없다. 오래된 빌라의 방음은 형편없는 것이어서 옆집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도 점점 소리를 내지르고 싶어 진다. 내가 듣기에도 내가 내는 소리가 너무 커지고 있지만,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이 기쁘고 괴로운 자극을 자발적으로 유지해 내기 위해서는 인내 섞인 소리를 내지르는 수밖에 없다.


미지근하고 뭉근한 것이 회음부를 따라 흘러내린다.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몸에 쌓은 독을 같이 내보내는 기분이다. 아, 지금이다. 시원한 마지막 배설과 함께 질 근육이 부들거린다. 동시에 전원 버튼을 눌러 기계를 끈다. 기계를 오른쪽 엉덩이 옆 바닥에 내려놓는다. 사방이 고요하다. 벗겨진 내 하체가 보인다. 기계를 들었던 오른손을 들어 오른 손바닥 전체로 살짝만 건드려져도 감전된 것처럼 몸이 떨리는 부분과, 외음부 전체를 덮어본다. 미끌거리고 끈적이는 것이 멍게 같다. 치골 위 양쪽으로 부푼 클리토리스의 양 뿌리가 느껴진다. 계속 앉아 일하며 내 다리가 부어올랐을 때와는 달리, 이스트를 넣은 빵 반죽이 잘 구워져 부풀어 오른 것 같은 클리토리스의 다리가 풍성히 만족스럽다. 외음부를 덮은 손바닥을 떼내면 이 만족감이 달아날까 싶어 손바닥과 갓 폭발한 살점이 만나 내는 열기를 음미하며 한참을 같은 자세로 있는다.


소생한 듯한 가벼운 다리로 남은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는 새 힘을 얻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롯이 기계와 내가 나를 감각하게 하고 오롯이 내가 나를 감각하던 나를 돌보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모든 감각을 숨죽인 채로 컴퓨터 앞으로 향한다. 해방되었던 몸을 다시 컴퓨터 앞에 앉힌다.

매거진의 이전글 써달라고 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이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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