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아저씨 Jul 03. 2015

그녀의 책은 늘 말한다, 다 괜찮다고

내가 사랑한 글쟁이 4. 공지영



스물몇 살의 그녀는 그날도 단골 술집이었던 카페에 갔다. 카페에 들어서니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남자 손님이 그 카페의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을 마시고 있더란다. 다른 자리는 다 찼고. 카페 주인은 전에 없이 합석을 권했다. 그렇게 같은 테이블에서 각자 술을 마신다.  

    

스물몇 살의 그녀는 공지영, 꼬질꼬질한 그 남자는 이외수였다. 둘 모두를 알고 있던 카페 주인의 배려였다. 공지영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갑자기 울음이 차올랐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고, 그의 책을 모두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너무 미웠다.” 공지영은 손에 가득 쥐어져 있던 성냥개비를 그에게 던졌다. “이외수라고! 흥! 이외수가 무슨 개뼉따귀야!”   


지승호와의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에 나오는 일화다. 그렇게 이외수에게 성냥개비를 던졌던 '철없는' 문학소녀는 이제 이외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혹은 넘어서는) 국내 대표의 문인이 됐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3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가’ 설문조사를 했더란다. 1위는 이외수(12%), 2위가 공지영(8%)이었다. 박경리(7%) 이문열(6%), 신경숙(5%)이 뒤를 이었다.  


공지영 작가. 사진의 원본 출처를 찾지 못했다. 


신경숙이라는 이름이 언급됐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를 대표하는 한 여성작가의 몰락을 보면서, 또 다른 한 여성작가를 떠올리고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일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둘을 비교하게 될 테니까. 핑계를 대자면 내 책임은 아니다. 박경리와 박완서 사후(死後)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는 누가 뭐래도 공지영과 신경숙이다. 아마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없었더라도 공지영을 언급하면 그 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공지영을 좋아한다는 것은?     


공지영을 좋아한다는 것과 신경숙을 좋아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공지영을 좋아한다'는 말은 공지영의 '글'만 좋아한다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그녀의 글을 포함해 그녀의 삶, 정치적 견해, 사회적 발언, 실천적 행보까지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공지영을 좋아한다는 말속에는 '공지영이 예뻐서 좋다'는 뜻도 녹아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공지영을 싫어한다'는 말속에는 공지영의 글뿐만 아니라 ‘오지랖’ 넓은 그녀의 모든 것을 싫어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공지영 작가에 대해 그동안 쏟아졌던 원초적이고 추잡하며 심지어 중세스럽기까지 한 비난과 증오를 보면 그들이 공지영의 그 모든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공지영이 예뻐서 싫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신경숙은 다르다. 간단하게 말해 ‘신경숙을 좋아한다’는 말은 거의 신경숙의 '글’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팬덤도 없지만 공지영에서처럼 그런 증오도 없다. 그런 신경숙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신경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사람과 글을 떼어서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되더라).  그 글이 표절이다? 더 이상 신경숙의 글은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       


공지영이 쓴 책에 비해 사실 읽은 책, 소장하고 있는 책은 몇 권 안된다.


공지영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책이 출간될 때마다 찾아서 읽는 사람도 있지만, (늘 책을 끼고 살면서도) 공지영의 책만큼은 애써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공지영도 좋아하고 공지영의 글도 좋아하지만 SNS 상에서의 잦은 정치적 발언만큼은 싫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공지영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신간이 나오면 대부분의 신문이 비슷한 크기의 지면을 할애하지만, 수십만 부가 팔려나가도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 신문도 있다.  


내가 공지영을 바라보는 심정과 태도는 그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괜찮다, 다 괜찮다’. 내가 공지영(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짓말 조금 보태 백 가지쯤 될 것 같다. 가끔 개인적인 삶의 변화로 그의 사생활이 입방에 오를 때도, SNS에서 이런저런 분노를 쏟아내다 ‘설화(舌禍)’에 휘말릴 때도, 난 늘 ‘괜찮다, 다 괜찮다’였다. 편협하다고? 너무 주관적이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더니 후배가 "선배는 예쁘면 다 좋아하잖아요"라는 뼈 있는 농담으로 나의 팬심을 희석화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소설, 아무나 쓰는 게 아니더라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글 때문이다. 동명의 소설집에 실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읽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소설’이 아니라 ‘그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그 책의 문장, 문체, 구조, 심지어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흐릿하지만 그 글을 덮었을 때의 내 기분과 느낌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소설,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인간에 대한 예의. 그렇게 살진 못했지만 사람 관계에서의 변곡점이 생길 때마다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누군가 사랑을 논하면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야."  누군가 우정을 언급해도 이렇게 말했다. “우정의 관계에서 우정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예의야.”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개인적 정서도 그렇지만 정의니 도덕이니 규범이니 이런 사회적 그물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장편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는 거의 비슷한 시기 출간됐고, 비슷한 인기를 누렸으며, '소설가 공지영'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책들이다.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맨 뒤에 실린 작가의 ‘후기’를 읽으며 이런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것은 후기이자, 이제 본격적인 소설가의 삶을 걷기로 한 어떤 문청(文靑)의 결기 어린 각오이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어떤 생물도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에 천착할 것이다. 배가 고프면서 제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움, 하나밖에 없는 제 생명이 아득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을 알면서 도청에 뛰어들었던 시민군의 아름다움, 고문을 받으면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고 싶다. 우리들의 조상들이 동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천만 년 동안 몸부림쳐 진화한 결실을 새삼 스스로 인식할 때 우리들은 스스로 존엄해지지 않을까.”   


◇위로받고 싶을 때 늘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는 그런 그가 좋다. 나이 들어가며 그런 날 선 결기 대신 누구의 고민이라도 넉넉하게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한 글도 좋아졌다. 젊은 나이에 지나치게 부드럽고 포용 있는 척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도 여전히 천방지축 좌충우돌하는 모습도 영 불안하다. 내가 공지영의 글을 다른 비평가나 전문가처럼 면밀하게 추적하진 않았지만 그는 젊었을 때 ‘젊은 글’을 썼으며 나이가 들면서 ‘나이 드는 글’을 쓴다. 결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2008년 출간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가 자신의 딸(위녕)에게 들려주는 얘기의 형식을 빌었음에도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얘기인 것처럼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딸에게 주는 레시피>도 책으로 나오기 전 <한겨레 21>에 연재된 글을 빠짐없이 읽었다(공지영보다 어린 것은 맞지만 딸도 아니고, 딸 나이도 아닌데 왜 위로가 되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2010년 출간됐지만 지난해에야 읽은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는 직장과 사람 관계로 신산스러웠던 나에게 큰 위로였다. 2012년에는 ‘공지영의 앤솔로지’라는 부제가 붙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를 읽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공지영 작가의 책에 실린 사진들. 


사실 공지영의 ‘팬’을 자처할 만큼 그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없어진 것도 몇 권 있겠지만 책꽂이에 꽂혀 있는 공지영의 책은 10권 남짓에 불과하다. 심지어 <딸에게 주는 레시피>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금 고민하고 있다(이건 덕후의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아는데 전부를 알 필요는 없듯, 그를 좋아한다고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눈치챈 공지영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공지영에 대한 실망, 분노, 증오, 외면 등의 이유를 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시 그의 삶이 마음에 안 들어 그의 글도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어떤 책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읽기>를 감히 권한다. 내가 그 책을 덮으며 느낀 소감은 이랬다. ‘그냥 영락없는 푼수 아줌마.’ 일면식도 없지만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그가 좋다.      


힘들고 외로울 때가 있었다(왜 없었겠나). 그때마다 공지영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공지영의 책은, 글귀들은 늘 거기에서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다, 다 괜찮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 작가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그를 응원할 것이다.


by 책방아저씨


<배경 사진의 출처는 한겨레이며, 인물 사진은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확인되는대로 출처를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