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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을 위한 변명  

 일제강점기 멸치와 쇠고기의 경쟁

황교익을 위한 변명 –  일제강점기 멸치와 쇠고기의 경쟁

추석 연휴의 아침에 덕망있는 브랜드 전문가인 페친이 황교익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다.
나름 팬층이 있는 분이라 어떤 분이 황교익의 수요미식회 마른 멸치 발언에 대한 답변으로 
황교익이 쓴 
자산어보의 마른 멸치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2016년 4월 24일 황교익이 블로그에 쓴 글을 올렸다.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요즘은 별로 이런 답변도 안하는데 이때만해도 나름 사람들의 비평에 민감했던 것 같다. 
 
근래에 멸치와 관련하여 여러 분들이 문의를 하였다.
내가 방송에 나와 "잔치국수의 멸치육수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국물"이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는 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산어보에 보아도 멸치국이며 마른멸치가 등장하니 우리 조상들은 멸치육수를 내었다는 것이다.
곧 바로잡힐 줄 알고 내버려두었는데 여기에 바른 토를 다는 이들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 그 엉터리 정보가 바른 정보일 것이라 오인하는 이들이 있을 듯하여 TV조선에서 하는 프로그램에서 슬쩍 바로잡아주었다.
방송은 그 내용이 쓱 흘러버려 다시 찾기가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 다시 정리하여 올린다.
 
우리가 흔히 마른멸치라 부르는, 육수용으로 쓰는 그 마른멸치의 생산 공정은 이렇다.
 
멸치를 먼저 끓는 소금물에 삶아낸다.
멸치가 워낙 작으니 슬쩍 데치듯 삶는다. 

이를 채반에 받아 물기를 빼고 말린다.
예전에는 볕에다 널어서 말렸는데 요즘은 대부분 건조기를 쓴다.

마지막에 이런 마른멸치가 만들어진다.
볶음으로 먹기도 하고 국물을 내는 용으로도 쓴다.

이런 마른멸치 가공법은 조선에 없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조선의 사정을 감안하면 저러기가 쉽지 않다.
약간 평평한 모양의 무쇠솥이 있어야 하고, 소금과 연료도 넉넉하여야 한다.
노동력도 꽤 필요하다.
조선의 어업 형편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위의 이 멸치 가공법은 일본인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유입된 것이다.
이런 멸치를 자건(煮乾)멸치라 하였고 일제강점기 식민지조선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그러면, 자산어보에 나오는 마른멸치는 대체 뭔가 궁금할 것이다.
그냥 말린 것이다.
'자건멸치'에 밀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마른멸치이다.
그 가공법은 이렇다.

멸치의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물에 씻은 다음에 펴서 말린다.

이 가공법으로 완성된 마른멸치이다.
이 마른멸치는 양념으로 무치거나 볶거나 조려서 먹는다.
국물을 내는 용도로 쓰지 않는다.

자산어보의 멸치국은, 그냥 멸치국이다.
생멸치를 넣고 끓이는 국이다.
'자건멸치'로 국물을 내어 끓이는 국이 아니다.
이런 멸치국은 멸치 산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은 나만의 주장이 아니다.
국사편찬위의 학자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멸치도 일시 다획성 물고기이므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가공이 필요하였다. 멸치는 회로 먹거나 구어 먹을 수 있고, 마른 멸치로 만들 수 있으며, 지방을 채취하여 어유를 만들 수도 있고, 부패하면 비료로 쓰기도 하였다.0612) 이 가운데 가공품은 마른 멸치와 멸치 어유이다. 마른 멸치는 잡은 멸치를 모래사장에서 말려서 만들었는데 오늘날처럼 삶아서 말리는 煮乾品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멸치는 말려서 포를 만들기도 하고 미끼로 쓰기도 하였으며 국이나 젓갈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고 하므로,0613) 멸치를 원료로 한 젓갈을 만들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멸치의 대량 처리는 소건품과 젓갈로 가공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33_0020_0070_0010_0070

https://m.blog.naver.com/foodi2/220691917561

사실 난 식육마케터이기 때문에 황교익이 이야기하는 다양한 분야의 식재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고기쪽에서 그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는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싶지만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음식 인문학이나 음식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책과 그의 강연과 그의 방송 때문이었다. 난 그저 지난 30년동안 돈을 벌기 위한 식품을 연구했지 음식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방송에 나와서 하는 황교익을 보면서 적어도 고기 분야에서는 바른 인문학과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소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상한 기사를 하나 찾았다. 
1937년 10월 16일 동아일보의 기사 
기사 제목이 소고기 대신 쓸 수 있는 메루치의 영양



1938년 6월6일 역시 동아일보의 기사 
기사 제목이 육류보다 메루치가 영양가치배증


 위의 두 기사는 고기 육수 대신 멸치 육수를 쓰자는 계몽기사다. 
많이 잡혀도 거의 먹지 않고 비료로 많이 쓰거나 김장에 들어가는 멸치젓을 만들어 먹었던 메루치를  일제는 메루치를 소고기 대신에 사용토록 권장하고 있다. 

1937년 10월 16일의 기사를 풀어 써 보면 아래와 같다. 

소고기대신 쓸수 있는 멸치(메루치)의 영양

소고기 대신 쓸 수 있는 메루치의 영양 값에 비하여 영양가치가 많다.

여름동안 우리는 무섭게 비싼 소고기를 먹어 왔습니다. 한근에 60전이라는 비싼 값에 다가 안심이나 등심은 10전이 더 비싸게 먹었습니다.

근일에 이르러 고기값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다시 오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실상 소고기를 많이 넣어 곰국이나 끓이거나 맛있는 고기로 구워서 많이 먹지 못하면 먹은 것 같지 않고 오전어치나 십전어치 사다가 찌개나 국을 넣는다면 그것으로 영양분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영양분을 소고기에서 얻지 못할 바에는 어쩔수 없이 생선에서 얻을 수 밖에 없는데 도시에서는 생선이란 소고기만큼 비싸서 대용물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생선중에서 값이 싸고 영양가치가 생선중에 제일 많은 것이 있으니 메루치라는 것입니다. 

이 메루치라는 것은 남조선에서 매우 많이 나는 것으로 지금은 조선 가정에서 감장할 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존재가 있는 만큼 메루치라는 것은 맛있고 영양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메루치 젓국물이 안들어가면 조선 김치는 맛없는 김치가 되는 것을 보아도 메루치의 맛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 합니다.



       
이상의 표로 보아 단백질은 우육보다 훨씬 많으나 지방과 회분은 좀 떨어지기는 하나 이것도 백그램단위의 비교니 소고기보다 몇갑절이나 싼 메루치를 이백그램 섭취하면 그만큼 영양가는 훨씬 소고기보다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루치를 육류의 대용으로 식탁에 올려 놓아도 아무 상관 없을 뿐 아니라 영양있고 경제적인데는 더말 것이 없습니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건  그 시절 사람들은 곰국이나 구이용으로 근당 소고기를 지금처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5전,10전 어치씩 소량 구매하여 육수용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고기 한근 600그램에 60전이면 100그램에 10전이라는 계산이 나오니 소고기 일회 구매량이 50그램이나 100그램 아주 소량이었고 구매의 목적이 찌개나 국의 육수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메루치는 김장용 즉 김치를 담을 때 쓰는 젓국용의 용도 보편적이었고 일제는 소고기 육수대신 영양가가 풍부하고 가격이 저렴한 메루치 육수를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때 사용하는 메루치는 지금의 말린 메루치였을 것이다.

문제는 왜? 1909년부터 조선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일제가 1837년에 와서야 마른 멸치를 육수용으로 사용하기를 권장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937년 7월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 전쟁으로 조선우의 이출과 군용 쇠고기 소비량이 늘어나서 쇠고기를 일상에서 사용하던 조선사람들에게 멸치 육수를 대신 보급하고 군인들이나 일본 본토로 소를 이출해 가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동안 150만두의 조선우가 일본으로 건너간 자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이 1937년 7월7일이었고 동아일보에서 메루치에 대한 계몽을 시작한 것이 그해 10월 16일이었다면 분명 메루치의 권장은 가격의 문제이기 보다는 조선우의 공출 확대를 위해 조선에서의 소고기 소비를 둔화 시키고자 했던 식민지 통치 전략이었다. 

아무리 방송이지만 이런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지 갑자기 우리 민족은 무지해서 말린 메루치도 만들지 못해서 일본 기술의 도입으로 지금은 건 멸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이야기하면 기분 좋을 사람이 별로 없을 거다. 

일제가 조선반도에 지금의 육수용 멸치에 보급에 힘쓴 년도는 전쟁이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의 일이었다. 아마 이렇게  게몽을 하기 시작했다면 이미 메루치가 생산되고 있었는데 소비가 안되니 소비 확대 측면에서 신문에서 게몽을 하기 시작한 것이니 아마도 일제에 의해서 멸치 가공기술이 도입된 정확한 해는 다시 찾아 봐야 한다. 
난 식육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1937년에 조선우의 공출 확대를 위해 메루치의 소비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 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1930년대 조선 인민들은 쇠고기 소비 형태는 육수를 내기 위해 50그램, 100그램씩 소량 구매가 이루어 졌다는 걸 신문기사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소량 구매도 제수용 탕국을 끓이는데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난 아직 식육의 역사를 공부하는 중이라 내가 쓴 글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공부한 것을 정리 해 보았다.
이 내용에 대해서 더 하거나 수정할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면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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