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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May 04. 2024

가정의 달인데 가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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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야 나와, 놀자.'


금요일 아침, 평소 바쁜 친구 H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금요일은 항상 일에 쫓기는 날인데, 긴 연휴를 앞두고 일이 일찍 끝나 고향으로 바로 온다며 만나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백수인 나는 언제 불려도 바로 갈 수 있는 대기조 인생이라, 고민 없이 바로 "오케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3개월 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항상 하는 코스대로 마라탕을 먹고 아이쇼핑을 하다가 코인 노래방에 들어갔다. 하교시간이랑 겹쳐서 그런지 노래방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늦게 온 중학생 여학생들이 먼저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나와 H는 깜짝 놀라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먼저 왔어요!!!'를 외치며 빠른 걸음으로 풋풋한 중학생들을 비집고 방안으로 입성했다. 금요일 대낮에 나이 40살 먹고, 중학생한테 자리를 양보해 줘도 부끄러운 현실인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십 대 아이들을 제치고 좀스럽게 들어와 후다닥 앉은 우리의 모습이 참 처량했다. 어른으로써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순간은 찰나고 즐거움은 영원하다. 잠시 현타가 왔지만 곧 나와 H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나게 댄스 메들리를 이어갔다. 한참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있는데 H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서 문자를 보내는 게 신경 쓰였다. 요즘 자기 친구가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이혼을 하니 마니 고민이 많다고 상담 문자가 잦다고 했다. 너와 나는 이런 고민 따위 안 해도 돼서 행복하지 않냐는 H의 말이 진심인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나이 40살의 노처녀 둘이서 파란 대낮에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 현실이, 이혼을 앞둔 유부녀보다 행복한 삶일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H가 갑자기 스트레스받는 직장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나에게 부러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H는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걱정 투성이라며 가끔은 우울하기도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 H에게, 나 또한 취직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백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즐겁고 편안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나만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H에게 알렸다. 우린 서로 1평도 안 되는 어두운 코인 노래방 안에서 각자가 더 불행하다는 계획에도 없는 불행 배틀이 시작되었다.


노래방 시간은 점점 줄어가고 이렇게 이야기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누가 더 비참한 노래를 찾아 비참하게 부를 수 있을지 대결을 하기로 했다. 진 사람이 후식으로 커피를 사야 하는 벌칙까지 완벽하게 정했다. 그리고 곧 40살의 두 노처녀의 눈물 없이 들어줄 수 없는 비참메들리가 시작되었다.


게임을 먼저 제안한 H가 진지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매일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다.

정키가 부른 '홀로' 


이번에는 내가 자아성찰 노래를 한 곡조 뽑겠다고 호기롭게 노래를 불렀다.

김태화가 부른 '난 참 바로처럼 살았군요'


그리고 곧이어 아무런 곡 설명 없이, 무언의 비참배 노래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H의 차례

나훈아의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


내 차례

메이비 & 하울의 '연애'


H의 차례

양혜승의 '화려한 싱글'


내 차례

아웃사이더의 '외톨이'


H의 차례

장소영의 '스물아홉'


세상에는 정말 많은 비참하고 슬픈 노래들이 존재했다. 우리는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끝없이 노래를 찾아 부르며 승부를 가리려 했다. 웬만한 오디션 프로그램 못지않게 우리는 너무 어이없게도 진지했다. 시간은 4분가량 남았고 마지막 한판승으로 결판 짓자 했다. 그리고  더 슬프게, 더 곡소리 나게 부르는 사람에게 예술 점수를 부여한다는 잔혹한 규칙을 추가했다.

나는 로또번호 고를 때만큼이나 신중하게 노래를 검색한 뒤, 시작 버튼을 눌렀다.


김현성의 유죄(형벌)

오늘 아침이 내겐 너무도 무거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어

왜 일어나야 해 왜 눈을 떠야 해

무얼 위해서 내가 숨을 쉬어야 해



완벽한 비참함.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이 노래보다 더 비참한 노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심지어 제목 옆에는 괄호로 '형벌'이라는 소제목까지 달려 있는 노래였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을 생중계로 보는 사람처럼 간절하고 비통하게 노래를 부르며, 마치 곡조에 몸을 맡긴 채 질질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노래에 몰두했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형벌이고 마지막잎새이니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H도 나의 승리를 직감했는지 다급하게 노래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중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대단한 발견을 한 냥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마지막 노래를 예약했다.


김조한의 사랑에 빠지고 싶다

난 너무 외롭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사랑이 뭘까 난 그게 참 궁금해

사는 게 뭘까 왜 이렇게 외롭니



이 년이 가사를 썼나 싶을 정도로 찰떡인 노래 선정. 

대놓고 외롭다는 가사와 목메는 염소 바이브레이션이 더해진 H의 장례식 창법에 이미 승부는 났다.

누가 들어도 H의 압승이었다.

그래 니가 이겼다.

외롭다고 외롭다고 악쓰는 한 서린 노처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커피 내가 살게 이년아, 먹고 떨어져.



웃자고 만나, 재밌자고 간 노래방에서, 즐겁자고 시작한 게임이 결국 우울하게 끝이 났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저녁, 우리는 코인 노래방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향했다.

조잘거리는 여고생들 사이에 앉아 귀 아프게 울려 퍼지는 아이돌 노래에 묻혀 우리는 묵묵히 아메리카노를 마치 사약처럼 홀짝거렸다. 혀가 쓴 지 현실이 쓴지 모르겠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처럼, 비참을 나누니 ㅂㅂㅂㅂㅂㅂㅂㅂㅂㅂㅣ참이 되었다. 가정의 날을 앞두고 참으로 뜻깊은 하루였다.













행복한 가정의 달,

노처녀들이 추천하는 곡.




https://youtu.be/kQI6_EzvfoU?si=77f_YA7MUol-B2ox



https://youtu.be/JujfqqWwEdM?si=bFmS9rrR2pVvAw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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