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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건니생각이고 Jan 29. 2019

여보, 얘 뭐라고 하는 거야?

아빠와 딸이 소통하는 법

 아기가 아내 배속에 있던 다소 평온했던 시절,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될지 정말 막막했습니다. 마음의 준비 외에 딱히 어떤 준비도 않다가, 이런 상태로 아이와 만났다간 큰일 나겠단 생각에 어느 순간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그때부터였죠. 육아 관련 도서, 영상 등 도움될 만한 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언어 소통이 안 되는 아가들과 어떻게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아가들과의 소통은 어른들의 대화와는 극명하게 다르단 사실을 말이죠.


신생아 <우린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원하는 건 분명한데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어서 아는 단어들은 몇 개 있는데 그마저도 도무지 발음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실, 말은 커녕 팔다리도 내 생각처럼 잘 안 움직여지고, 등은 배기고 아파 죽겠는데 옆으로 돌아 누워지지도 않습니다. 그 와중에 배 아래로 찝찝하게 축축해진 기분입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상쾌한 기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눈도 부릅떠보고, 숨도 거칠게 쉬어 보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엄마 아빠는 눈치도 없습니다. 얘 눈 큰 거 보라며 귀엽다고 연신 사진을 찍고, 애꿎은 내 볼만 더 공격적으로 만져댑니다.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으앙!!!!!!!!!!"

  울고 싶어서 운 건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몸에 조금만 힘주면 가능한 일이고, 또 효과가 있었기에 이럴 때마다 쓰는 방법일 뿐입니다. 소리도 제법 크게 나오고, 눈물까지 함께 나옵니다. 이제야 나의 고충이 뭔지 찾아내려 주변이 분주해집니다. 배도 안 고픈데 갑자기 뻥 과자를 입에 물려줍니다.

 "으앙!!!!!!!!!!!!!!!!!!!!!!"

 답답해서 속이 터지겠습니다. 갑자기 귀에 뭔가를 대더니 "열은 없는데...."라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나의 찝찝함은 더해만 갑니다. 다른 표현 방법이 없어 힘껏 더 소리 내어 울고 있던 찰나, 내 몸 여기저기를 관찰한 엄마 아빠는 드디어 친절한 기저귀의 색깔 변화를 발견하고는 뒤늦은 '긴급 조치'에 들어갑니다.




 사실 이 시기엔 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 참을 수 있는 인간이었나를 수도 없이 되뇌며, 모든 관심과 집중을 아기에게 쏟아부어야 됩니다. 안타깝지만 그 방법 말곤 없습니다. 아기가 우는 이유는 크게 졸리거나 배고프거나 쉬 또는 응가를 했거나의 세 가지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자주 '울어 댑니다'. 지나고 보면 행복한 시기일 수 있으나 당장 그 순간에는 행복이고 뭐고 "짜증 참기" 하나 해내기도 벅찹니다.

 사회생활을 통해 나름 터득한 '역지사지'의 기지를 발휘해 보려고 했으나, 아기의 입장을 알기 전에 아기보다 못한 저의 인내심을 마주하고 자포자기하기 일쑤였습니다. 이제와 그 시기를 돌아보면, 경력까지 포기하고 육아에 집중해 준 아내, 체력적으로 힘드신데도 흔쾌히 도와주신 양가 부모님(특히, 장모님), 선물까지 준비하며 찾아와 준 아내의 친구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흘러가는 시간의 절묘한 조합 덕에 지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 1~2세 <조금 아니까 더 답답해요>


 몇 개의 단어만 가지고도 해외여행이 가능한 것처럼 그들도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아직 '인내심'까지 기르지는 못한 상태라 한 두 번의 '리스닝 기회'를 놓치게 되면 그 대가로 부모는 그들의 '짜증 수발'을 들어야 합니다. 짜증을 표현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죠. 소리 지르고, 눈 앞에 잡히는 거 떨어뜨리고, 울고, 때리고 등등. 아직 교육되지 않은,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이에 더해 신생아 때와 비교하면 짜증의 수치는 더욱 올라갑니다.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우는 단계로 바로 넘어가던 신생아 때와 달리 이 시기엔 '짜증 폭발' 단계가 추가됩니다. 나름 터득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효과'를 보는 짜릿한 경험이 그들에게 '노하우'로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기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바닥에 누워 떼를 썼을 때, 당황한 부모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왜 식탁에 있는 물건을 떨어뜨릴까?"
"글쎄. 그럼 실제 우리의 눈높이를 딸내미 키에 맞춰보자!"

 아이가 식탁에 있는 물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반복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행동 자체만을 문제 삼아 아이에게 '물건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나쁜 거야'라고 알려주었지만 개선되지는 않았지요. 아내와 곰곰이 생각하다 아이의 키에 눈높이를 맞춰보기로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식탁을 바라보았고, 아차 싶었습니다. 우리에겐 훤히 보이던 사물들이 옆모습만 겨우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이의 키는 까치발을 들면 겨우 식탁 위가 보이는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옆모습이 보이니 전체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해결하는 방법이 '떨어뜨려서 확인하기'였을 테구요. 떨어뜨리는 행동 자체를 나무랐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왜 그러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떨어뜨리지 못하게만 했던 아빠에게 서운해하지 않았던 딸내미가 말이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에게 '소통'은 피해 갈 수 없는 '숙제'입니다. 역할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수위와 방법으로 소통해야 원활히 그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중 아이와의 소통은 으뜸이지 싶습니다. 아이에게 다양한 관계가 생겨날수록 아빠인 저와의 관계는 침범당할 위기에 놓일 겁니다. 사춘기라는 대위기도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하겠습니다. 아빠와 딸은 어쩔 수 없이 거리가 생긴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게 계속 소통해야겠지요.


"난 아빠가 제일 좋아!"


 지금도 저를 '심쿵'하게 만드는 이 말, 아주 오래오래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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