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한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몇 차례의 대유행과 백신 접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확진자의 추세. 사회적 거리두기는 4단계에 머물러 10시 이후에는 음식점과 술집이 모두 영업을 종료하고 거리의 사람들은 집으로 향해 발길을 돌린다.
한밤중인 오전 1시, 나와 애인은 밤 산책을 시작한다. 가로등만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허전한 길거리를 허수아비처럼 지키고 서 있다. 지난 2020년 2월부터 시작된 우리가 걷는 이 시간.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그리고 서로의 손을 의지한 채 텅 빈 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애인 집이 있는 신정동에서 목동역까지, 목동역에서 목동 41 타워까지. 왕복 50분에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매일 걷는다.
그 당시에 나는 아버지와 싸우고 가출을 감행한 상태였다. 나는 애인의 자취방으로 도망치듯이 오게 되었고, 가출하고 가방을 싸서 온 나를 애인은 두 팔 벌려 안아줬다. 가족과 애인 모두 나의 병을 알고 있었지만, 가족과 애인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나의 부모님은 조현병이라는 나의 병이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며 의지만 가지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당시 의지를 가질 만큼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런 무기력증과 우울감은 나를 자꾸만 안으로 가두기만 했다. 나는 예민했고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끝내 아버지와 크게 싸운 뒤에 집을 뛰쳐나오게 된 것이다.
애인은 나의 병이 혼자 의지만 가지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인은 함께 병을 극복해 보자고 불안한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의식주 모든 면에서 나를 케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이곳에 와서 몇 날 며칠을 씻지도 않고 생활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잠에 다시 들 때까지 영화와 드라마만 정주행 했다. 애인이 해주는 밥을 먹고 잠을 잤다가 똥이 마려우면 똥을 쌌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폐인 생활을 이어나갔고, 애인도 그런 나를 보면서 지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답이 없던 내가 변화하기 시작한 건 바로 걷기 때문이었다. 예전 대학 시절, 담당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다.
"**아, 감정이 쌓이고 분노가 일 때는 걸으렴. 걷게 되면 생각들이 많이 해소가 된단다."
물론 그 교수님의 처방이 생각나서 곧바로 걷기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애인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애인은 집에서 드러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 씻기고 밤 산책을 나가자 했다.
그 당시, 코로나 초기였던 상태라 나라 전체가 벌집을 들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했다. 게다가 신천지, 대구경북발 확진자가 몇 천명에 이를 때였다. 낮에는 확진자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위험이 있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밤 시간이나 이른 아침을 택해 우리는 산책을 나섰다. 남정네 둘이서 손을 잡고 사람이 없는 대로를 마음껏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애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나섰는데, 사람들이 많았다면 꺼리고 피했을 거리를 다행히 인적이 드물어 조금씩 마음 놓고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산책은 한겨울부터 늦봄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면서 나는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가망이 없을 것 같던 무기력과 우울감에서 벗어나 봄이 약동하듯 규칙적인 바이오리듬을 되찾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애인과 아침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점심을 먹고 다시 점심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 한 편씩 보거나 책을 읽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 산책을 나갔다. 한동안 저녁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기 전 밤 산책을 나왔다.
시간대별로 산책은 그 느낌이 달랐다. 아침산책은 신선하고 찬 공기가 느껴지고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면 나도 그 사람들의 에너지에 전염된 듯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점심 산책은 해가 가장 높이 뜰 때라 따뜻하지만, 소음이 최고조일 때다. 시끌벅적한 거리, 공사현장 등 도로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시끄럽기는 해도 점심 산책은 몸과 마음이 푸근해지는 효과가 있다. 아무래도 점심식사를 하고 나른한 몸을 움직여서 그런 것 같았다. 저녁 산책은 경치를 보기 위해 나온다. 해가 색색의 옷을 입고 도시의 마천루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탁 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째 애잔한 마음까지 들더랬다. 그렇지만 도로에는 공해가 가득하고, 사람들은 지친 얼굴을 한 채 퇴근길을 걷고 있다. 반면, 밤 산책은 단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이었다. 동성애자인 우리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었으며, 밤공기는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쓸어주었다. 초봄의 밤공기는 무척 찼지만, 우리는 패딩을 갖춰 입고 1시간 동안 인적이 없는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나는 가족과 화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진작에 풀려 있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화해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편지였다. 주일에 성당에서 만나는 엄마 편에 아버지 전상서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버지께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바람, 죄송함 등을 편지에 적어 보냈다. 그렇게 아버지께 가는 편지가 어느 정도 쌓일 무렵, 엄마 편으로 이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전언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말씀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생기 없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힘을 준 애인을 꼭 안고서 정든 그의 자취방을 떠났다.
그 뒤로 나는 집으로 돌아와 1주에 한 번씩 병원을 다니고 약을 복용했다. 병의 증세는 나날이 회복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지금은 글 쓰는 일과 몸 쓰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로 바빠졌지만, 나는 요즘도 생각이 많아질 때면 그냥 걷는다. 이제는 걷는 것이 좋다. 내가 평발이어도, 조현병이어도 상관없다. 애인과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그 산책길이 내 무기력과 우울감을 이기게 해 주었고, 그 경험이 지금의 활동적인 나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코로나라고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로나 블루가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이다 보면 우울감도 어느새 사라져 있을 것이다. 나는 걸었다. 담당 교수님의 말씀처럼 걷는 것이 잡념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분은 다른 방법을 취해도 좋다. 스트레칭을 해도 좋고, 근력운동을 해도 좋고, 계단 오르기를 해도 좋다. 우울감이 당신을 덮쳐올 때 몸을 가만히 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몸을 움직여야 우울감을 당신의 몸에서, 생각에서 쫓아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