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2)
수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 한 채 결국 '철학'을 희망 학과로 확실하게 정하게 되었다. 잊고 싶어도 수많은 매체들이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인구론'따위의 말로 인문계에 대한 공포감이 커져만가는 요즘, 그나마 낫다고 여겨지는 상경계열에서 문과 중의 진성 문과인 철학과로 희망 학과를 바꾸겠다는 '폭탄선언'을 한지도 어연 반 년이 훌쩍 넘었다.
학교 사람들은 그동안 나의 행보를 봐왔으니 곧 잘 수긍하곤 했지만, 앞뒤 다 자르고 '철학과'란 폭탄을 받으신 이공계 부모님께선 당연히 극구 반대하셨다. "대학 가서 취업되는 복수 전공할게요.", "경제학과가 너무 높아서 낮춰 가는 거예요" 등의 핑계로 설득은 했지만 아직도 나를 보면 "정말로 철학과 쓸 거니?", "나중에 후회해도 니 인생 네가 책임져라" 등의 말을 건네신다. 내 스펙으로 사회학과나 정치외교학과는 쓸 수 없냐고 물으시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닌 것을 보니 완벽하게 받아들이신 건 확실히 아니다.
온갖 핑계로 나 자신을 감싸다 보니 나의 진짜 마음이 점점 퇴색되어간다는 느낌을 종종받는다. 철학자라는 꿈 앞에 '정치'란 단어를 붙이고 난 후에 더 그런 것 같다. 대학 가서 다른 것을 부전공하든 대학 가서 세부 학문을 깊게 공부하든 어쨌거나 당장 내 눈앞에 놓은 것은 그냥 '철학'이다. 원하는 대학의 철학과를 가기 위해 1년 동안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또 그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드디어 출발선에 서게 된다.
지금은 약간 여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있지만, 분명 한 달 뒤에는 '스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일이나 학업 또는 생활기록부를 위한 책을 읽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겨울방학이란 잠깐의 휴식 겸 준비 기간을 지나 다시 무한경쟁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속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확실히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철학을 왜 좋아할까?
종종 언급하곤 하지만 '철학적인 것'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한 것은 동명의 EBS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자본주의(정지은, 고희정)'이란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동안 보지 못한 사회의 이면을 직시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경제사의 흐름을 맛보았으며 처음으로 수많은 석학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자에 대한 동경의 시작도 바로 이 책이었고, 경제학에 대한 관심의 시작도 바로 이 책이었다. 어디 가서 내 이야기를 풀어낼 때마다 항상 시작은 '자본주의'와 함께일 듯하다.
본격적으로 '철학'을 좋아하는 계기가 된 사회탐구 과목 '윤리와 사상'의 선택도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윤리와 사상'이란 과목은 크게 동양 사상, 서양 사상, 사회사상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 나의 이목을 끈 것은 '사회사상' 단원으로 그간 내가 경제를 공부하며 접해온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단어들이 보여서 별다른 고민 없이 '윤리와 사상'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철학을 비실용적이라 멸시하는 이들 중 하나였고, 가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던 논어, 맹자 따위의 인문고전이라면 질색을 해오던 터라 동서양 철학에 관련된 단원은 단지 재미있는 사회사상을 배우기 위한 시련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도 잠시, 윤리와 사상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인터넷 강의를 통해 먼저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시련의 과정'일 것이라 생각되었던 동서양 철학 파트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제자백가 시대의 공자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정약용, 정제두에 이르기까지의 유학 사상을 배우고, 불교 철학과 도가 철학을 지나 서양 철학까지 모두 배우고 나니 철학이 '비실용적'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굉장히 추상적이어서 현실과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철학의 시작과 끝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맹자와 순자가 성선설과 성악설을 논한 이유는 무엇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해결 방안은 무엇인지 탐구해보기 위해서였고, 이황과 이이가 이기론에 대해 논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심성의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한 지침을 제공해주기 위해서였다. 철학을 제대로 알기 전, 제일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심성론과 이기론이었지만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나니 철학적 논쟁들이 조금씩 의미 있게 느껴졌다.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다른 사상들도 결국은 인간, 혹은 사회를 위해 형성되고, 연구되고, 발전된 것들이었다.
이렇게 난 '윤리와 사상'이란 과목을 공부하며 철학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동시에 점점 철학에 빠져들었다. 교과서의 얕은 지식에 갈증을 느껴 직접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고 교수님들의 강연과 저서를 찾아보며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지식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간 나의 행보를 되돌아보면 단순히 윤리와 사상에 대한 흥미만으로 이 길을 택한 것은 확실히 아니다. 실제로 윤리 과목이 재미있어 철학과에 진학하였지만 대학에서 다루는 깊이가 고등학교와는 차원이 달라 후회하는 이들이 정말로 많다고 한다. 나도 이들처럼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계속해서 찾아보고, 또 생각해보았다. 이 고민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그냥 철학이 재미있다.
윤리 과목 공부를 하는 것, 철학자들의 책을 읽는 것, 철학 강연을 듣는 것, 그리고 이렇게 철학에 관한 내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 모두 그냥 재미있다. 특히 수많은 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들을 통해 당시 사회를 엿보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투영해보는 것이 정말로 재미있다. 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인 철학을 알게 된 후에 특정 분야에만 관심을 갖던 때보다 시야의 폭과 사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고, 깊어졌음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아직 딱딱한 고전이나 한국어인지 독일어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어려운 텍스트를 읽기엔 많이 부족하고, 종종 한계 상황에 봉착한다. 사실 지금도 읽던 고전 몇 권은 던져버리고 재미있는 정치평론을 하나 읽고 있다. 이러다가도 다시 '열린 연단'에 올라오는 철학 강연을 듣고, 여러 저서를 찾아 읽을 때면 매번 "매일 철학만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라 말하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딱 떨어지는 이유는 꼽을 수 없지만,
나에게 철학은 정말로 재미있다.
일단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본 다음에 후회하는 게 낫다.
지난 1년 동안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학교 윤리 선생님께서 종종하시던 말씀이다. 당신의 삶에는 나중에 손자, 손녀에게 들려줄만한 기억에 남는 일도 없었고,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조차 없다고 하신다.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정말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을 사셨다고 하신다. 일명 '선택의 철학'으로 불리는 실존주의 수업을 하실 때 당신의 삶을 대비시키시며 이야기해주신 것이다.
이 수업을 들으며 언제나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의 눈에서 '씁쓸함'을 보았다.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며, 또 학생 대부분이 당신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리라는 현실을 떠올리며 느끼신 '씁쓸함'을
그리고 진심을 보았다. 긴 삶을 되돌아보며 느끼신 바가 진실됨을, 또 눈 앞에 있는 우리들만큼은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던 '진심'을.
한없는 씁쓸함과 진심 어린 마음을 느낀 뒤에 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라"라는 조언은 그 어떤 훌륭한 연사가 하던 말보다도 훨씬 더 내 가슴을 울렸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은 절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분명 크고 작은 후회를 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고될 지라도, 이 선택 자체는 후회하고 싶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짧은 인생을 살아오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민을 해본 뒤에 한 '값진 선택'이다.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