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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파니 Mar 08. 2023

나도 살아야겠다

고독에 맞설 기회





“아이고~! 바빠?!” 


올 것이 오셨다. 목공방을 개업한 날부터 개근상이 목표인 학생처럼 성실히 방문하시는 동네 분이 계신다. 정년 퇴임 후 퇴직금과 연금으로 세상 여유로운 생활을 하신다고 해서 어찌나 배 아프게 부럽던지. 여기에 더해 중후한 외모와 기품 있는 목소리까지 흠잡을 데 없이 매력적인 분이셨다. 이럴 수 있나 싶게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만 쭈욱 뽑아 농축한 분이었지만 너무 완벽해도 의심스러운 법.     


물개 쌍 따귀칠 실력으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했던 소싯적 영웅담은 물론, 홀로 팔도를 유랑하며 맛보았던 별미와 그곳에서의 핑크빛 로맨스까지 수문이 열린 듯 쏟아내셨다. 세 시간이 넘게 말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이분처럼 초면에 귀에서 피가 날뻔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습자지만 한 신뢰라도 생겼을 때 반주 한잔 걸치며 안주 삼아 개인사를 꺼내놓는데 내 경험상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게다가 말을 많이 하신 연유로 공방에 비치된 믹스커피를 네 잔 째 타 달라고 하실 땐 설마 다섯 잔까지는 아닌지 위기감마저 들었다. 동네 분도 지치셨는지 네 시간을 못 채우고 자리를 털며 일어나셨다.

안도의 숨을 쉬려는 찰나,     


“아차차! 이걸 깜빡했네. 여긴 수강료가 어떻게 되나?”     


온몸에 전율이 뻗쳤다.

작금의 상황을 또 겪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주저 없이 주문 제작만 한다고 말씀드렸다. 동네 분은 매우 아쉬워하며 이내 발길을 돌려 나가... 려다 말고,     


“가끔 놀러 와도 괜찮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허를 찔린 듯 급격히 황망했다. ‘곤란하게 왜 그러세요.’라고 또라이가 될 각오로 답할지 격하게 고민했지만,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창백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그날 이후 동네 분은 “아이고~! 바빠?!”를 주문처럼 외치며 당당하게 작업실 문을 열어젖혔다. 바쁜 걸 뻔히 보면서 바쁘냐고 묻는 건 무슨 심리인지. 통상 바빠 보이면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가는데 이 분은 믹스커피를 손수 타서는 여분의 의자에 앉아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관망하셨다. 아니 감시하셨다.     

호시탐탐 내 일손을 놓게 할 타이밍을 노리며. 

나 역시 질세라 가열 차게 바쁜 척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 동네 분은 “쉬었다 해! 그렇게 일하다간 늙어 고생해!”라고 수시로 일침을 가해 작업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쉼 없는 작업에 허리가 저려와도 여기서 밀렸다간 세 시간 동안 기가 빨려 남은 일과를 공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신경전 속 재단기의 굉음만이 작업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동네 분은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며 홀연히 작업실 문을 나섰다. 명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간다는 인사말 같았다.     


이긴 건가? 신속히 재단기의 off 스위치를 누르곤 주먹을 한껏 치켜들어 승리의 세리머니를 날렸다. 두 시간 만에 얻은 휴식은 참으로 달고 평온했다. 하지만 이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0분도 안 되어 동네 분이 다시금 들이닥쳤다.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갔다 온다는 말이었다.     

결국 난, 제조사별 믹스커피 품평과 녹차를 제일 극혐 한다는 음료 취향을 세 시간 넘게 주입당했다.

다행히, 아직 귀에선 피가 나지 않았다.     


번번이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동네 분의 부재중인 염치를 탓하는 대신 나에게 더 큰 원인이 있진 않을까, 심각하게 곱씹었다. 결론인즉, 내 성격이 문제였다. 관계를 명확히 맺고 끊지 못해 속으로 끙끙 앓으며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 끌려다니는, 한마디로 착한 사람 증후군에 걸린 내 성격이. 불편한 감정을 완벽히 숨긴 채 찰진 추임새와 발랄한 리액션으로 이분의 흥을 돋우어 신명 나게 작두를 태워 드렸으니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자, 원인을 분석했으니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손 편지를 써서 속상한 심정을 전달해 볼까? 왠지 오그라든다. 그렇다면 음성사서함은 어떨까? 아니다. 더는 비겁하게 숨지 말자! ‘오실 때마다 정신적 피로감에 작업에 지장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대화는 1시간 이내, 믹스커피는 최대 두 잔까지만 허용됨을 양해드립니다.’라고 마주 보고 당당히 말하자! 이제 남은 건 실행할 용기뿐. 결의를 굳게 다지며 흔들림 없는 단호한 눈빛으로 동네 분을 대면해 본다. 젠장! 입이 안 떨어진다.

여태껏 이런 성격으로 살아왔는데 단번에 될 리가 없다.     


모든 걸 내려놓고 나날이 동네 분의 수다에 기가 빨리던 어느 날,      


“여기 커피는 유달리 맛이 좋단 말이야.”     


정확한 비율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믹스커피가 이곳에서 더욱 좋은 맛을 낼 리는 만무할 터, 동네 분의 뜬금없는 칭찬을 감사히 흘려듣고 있는데 불현듯 졸혼이 뭔지 아냐고 물어오셨다. 법적인 혼인 관계는 유지하되 각자의 삶을 사는 것, TV에서 관련된 다큐를 봤다고 하자 본인이 그걸 하고 말았다며 씁쓸하게 실토하셨다. 아내는 이혼을 원했지만, 자신이 원치 않아 졸혼으로 합의했다는 말과 함께 아내에 대한 추억으로 다시금 수문을 여셨다. 돌이켜 보면 아내분 이야기만 빼고 다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회한이 담긴 동네 분의 이야기가 비로소 마음에 담겼다. 말씀한 일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내의 요리 솜씨는 젬병인데 졸혼을 앞두고 차려준 밥상은 참으로 맛났다고 하셨다. 솜씨는 그대로였는데 말이다.             


믹스커피 다섯 잔을 끝으로 공방을 나서는 동네 분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아이처럼 쉬지 않고 말하던 행동이 조금 헤아려졌다. 혼자 오롯이 겪었던 외로움을 잠시나마 달래고 나눌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 이곳 커피가 믹스커피일지언정 맛 또한 좋았으리라. 너무도 이해됐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강한 사람이란 가장 훌륭하게 고독을 견디어 낸 사람’이라고 독일 철학자 실러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고독에 맞설 기회를 드려야 한다. 동네 분의 굳센 홀로서기를 위해 과감히 믹스커피를 치우고 극혐 하시는 녹차를 들였다. 단연코! 작업시간과 믹스커피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항변한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나도 살아야겠기에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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