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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15. 2023

사춘기 아들에게 아빠란?

아빠에게 '적당히'와 '눈높이'가 없을 때



아들 사춘기로 내가 하루하루 사그라져갈 때. 주변 사람들이 아빠 찬스를 쓰라고, 아들은 이제 엄마 선에서 컨트롤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이제 엄마는 손을 떼고 아빠에게 전권을 넘겨야 할 시기라고. 그렇지 않아도 평안해야 할 퇴근 시간, 내가 아들과 다투며 언성 높아지는 일이 잦아지자 남편도 어쩔 수 없이 '여자일'인 육아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남편과 아들의 결정적 순간 3가지.  


첫 번 째는 남편이 아들을 냅다 들어 침대에 내리꽂던 장면이다. 한창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던 아들이 PC방을 몰래 드나들고 하루종일 핸드폰을 눈에서 떼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와이파이를 뽑고 정신 돌아오길 스무 차례쯤 기다리고 난 어느 날. 평소 감정 조절 못하는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던 남편이 그날도 게임에 미쳐 부모의 말일랑 귓등으로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들을 달랑 들어 침대 구석에 처박았다. 40kg도 채 안 되는 아들이 90kg에 육박하는 아빠 손에 달랑 들려 종잇조각 구겨지듯 처박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후에 아들은 이 날 그 길로 경찰서로 달려가 아빠를 가정폭력 건으로 고발할 뻔했노라 실토했다)


두 번 째는 화장실에서 잠옷 바람으로 치카치카를 하고 있던 아들이 입에 거품을 문 채 질질 아파트 현관까지 끌려 나오는 장면이다. 그렇게 잘 씻던 아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제때 씻지도 자지도, 또 규칙적으로 먹지도 않았다. 샤워 후 방구석에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면 10장이 쌓일 때까지 내놓지 않았다. 아이패드를 사주면 이젠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공언하곤 늘 "다음 시험부터"라고 말한 지도 햇수로 3년 차 되던 해였다. 여름휴가로 떠난 보라카이 바닷가에서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제 좀 잘 살아보자고 손가락 건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가거나 가족모임 등 함께 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은 하고 살자고 약속했던 아들은 그날 아침에도 교회에 가기 싫어 화장실에서 부러 미적거리고 있는 중이었고, 마침내 시간 강박이 있던 남편의 불안에 불을 댕겼다. (그날 아빠 손에 끌려 나온 아들은 이 길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겠노라 우릴 협박했다. 하지만 우린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건 아들이었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건 늘 우리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전거에 잠시 기대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남편은 교회 남자 집사님들과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그리고 걔 중에는 지독한 아들 사춘기,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관계를 회복한 케이스가 꽤 있었던 거다. 내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몸놀이를 해주는 아빠는 아니었다. 하지만 캠핑을 가서 텐트를 치고 고기를 주워주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다행히 우리 집 아들들은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자전거부터 올라탔던 몸 가벼운 라이더가 이니던가. 사춘기 아들과 함께 하는 라이딩은 뭔가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1박 2일 아빠를 따라 왕복 120km 장거리 라이딩을 몇 차례 따라나섰던 아들은 아빠가 다음 코스로 부산까지 300km가 넘는 코스를 계획하자 그다음부터 슬슬 아빠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 남편에겐 '적당히'와 '눈높이', 그 두 가지가 없었다.

늘 100점을 맞던 아들이 어느 날 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려 오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시험을 쳤는데 문제를 틀릴 수가 있어?"

남편의 어조는 가벼웠지만,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남편은 학창 시절, 한 번도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남편은 영재였고, 모두 남편이 크면 대통령이 될 줄 알았다. 그는 공부했는데 점수가 안 나와 본 적이 없었고, 한때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놀러 다닐 때에도 전교 등수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첫째를 낳고 딸내미 산후조리 해주신다고 친정 엄마가 오셨을 때에도 그는 그 조그마한 아기 하나를 안고 여자 둘이 동동거리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꽃샘 추위가 남은 이른 봄 유모차에 비닐커버를 씌워 나가야 한다고 우길 때에도, 아직 덜 마른 몸으로 화장실을 튀어 나온 아들 뒤를 좇아다니며 이러다 감기 든다고 빽빽거릴 때에도 그는 혀를 찼다. 사춘기로 온몸이 잔뜩 예민해진 아들이 식탁에 앉아서 국이 싱겁네, 겉저리가 맵네, 할 때마다 그는 '사내 자식이 그냥 주는데로 먹지 않는다'고 뭐라 했다.


내가 아들들은 특히 중독에 약하니 핸드폰을 늦게 사주자고 하고, 거실에서 TV를 없애며 면학 분위기를 만들자고 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왜 아들에게 그렇게까지 맞춰줘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공부의 흥미를 점점 잃기 시작할 때에도 아마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학생이 공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춘기 아들 문제로 언성이 높아지는 날이 늘어나자 남편은 나의 과보호를 의심했다. 자신이 아들의 문제에 개입하려고 할 때마다 아내인 나와 시어머니가 자신을 막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한번도 아들 문제에 제대로 개입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과보호하는 여자들 때문에 아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라서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춘기 남자아이 특유의 비행과 급격한 몸의 변화와 부모에 대한 강한 거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남편은 남자라서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예민함을 그대로 표현하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남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아들은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지지받지 못했다. 그러니 아들도 적잖이 외로운 시절을 혼자 보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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