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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r 23. 2022

나의 선(善)을 위한 선(線) 긋기의 기술

  30대가 내게 준 선물이 있다면 그건 선긋기의 기술이다. 나이가 먹으면 주름과 지문이 선명해지듯이 30대의 내 거절들은 나를 선명하게 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 디딘 첫해에 나는 초심자가 그렇듯 새로운 세계인 일을 탐색하는 것에 충실했다. 내 새로운 세계의 적응을 위해 야근과 주말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렇게 일하는 내가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직장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도 유연했고, 업무도 그럭저럭 해냈다. 그러다 보니 초심자의 행운으로 첫 해에는 상도 받았다. 주변에서도 아직 어린데 잘 해낸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때는 그 칭찬과 격려들이 나를 스스로 길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비판적이고 착했던 나는 그것들이 나인 줄 알았다.    


  직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이었으나 나는 학창 시절의 방식을 직장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맺었다. 나는 일 년정도 함께하면 반 친구들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에게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직장에서도 관리자들에게 인정받고자 했으니 예의 바르고 웃는 낯으로 대했고, 선배와 동료들에게도 언제나 예스였다. 늘 내 의견이 그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떤지 조심스레 물었고 대답을 해주면 내 의견을 수정했다. 그러다 보면 외부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동료들의 일을 함께 나누었고, 퇴근 후 동료들과 모임이 잦았다. 나는 그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내 일을 도와주지 않는 동료나 선배들에게 서운했다. 우린 친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30대가 되었더니 이제 직장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다르다. 이제 직장에서는 그 이상을 해내야 한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직장에서는 나에게 보다 중한 일을 맡긴다. 사람들도 더 이상 나를 칭찬하거나 격려해주지만은 않는다. 나는 그저 “일 할 사람 왔다!”가 되어버렸다. 후배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유연한 후배들이 나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하지만, 새로운 직장 탐색의 과업을 마친 내게 직장에 온 시간을 쏟는 일은 그렇게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그저 나를 소진하는 느낌이 든다. 몰려드는 업무 앞에서 빠져나와 나를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저 내 일만 제대로 해내고 나를 채우고 싶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는 언제나 나를 자신 없게 만드는 질문이자, 답답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외부로의 칭찬과 격려, 그로 인한 스스로의 자존감의 어깨를 키워오느라 덮어두고 있던 그 질문이 30대가 되니 맥락 없이 묵직한 직구로 내게 꽂힌다. 별안간 자아정체감에의 욕구가 나를 노크한다. 나는 어떤 일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또는 어떤 상황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지.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뭔지가 너무나 궁금해진다.   

   

  내가 궁금하고 나를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내 안에 자리 잡자, 직장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내 업무도 내 것, 네 업무도 내가 거뜬히 도와주지! 했던 20대의 나를 내가 지웠다. 이젠 일을 하면서 ‘이게 내 일인가?’하며 일을 구분해낸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가 만만한가! 하는 생각에 심사가 꼬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을 쳐내느라 옥신각신 할 일이 생긴다.      


  더 이상 관계는 원만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잔잔했던 일상에 잡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 잡음은 내게 필요하다.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 내 일은 내가 제대로 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는 나를 채울 배움이라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직장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는 생각들을 정리해나갔다. 직장의 선(善)과 나의 선(善)의 균형을 위해 나는 적정한 선(線)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 먼저 내게 직장이란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직장에 사람들은 일을 하러 온 사람이지, 친목도모를 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 이에 직장의 선은 업무의 효율성과 효과성, 그를 위한 업무지시와 업무수행, 그리고 정확한 업무의 배분이다. 이곳에서 나의 선은 나의 업무와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된다. 이때  동료의 수고를 알고 인정하며, 겸손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동료를 대하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직장이 좋은 직장이다.


  자신의 업무를 해내는 과정에서 협조도 필요하고, 때론 논쟁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지금 이 사람은 00 업무를 하고 있는 담당자에게 일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것이지 인간 주윤에 대한 비난은 아니라는 것이다.  업무 간 선긋기뿐만 아니라 업무를 하는 나와 사적인 나와의 선 긋기는 나에게 중요했다.     


  또한 가끔 개인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는 관리자들의 업무지시에 서운해하는 동료들을 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결혼 준비에 한창인 직원이

“결혼 준비는 부모님이 다 하는 거니까 00 업무를 이번에 주윤 씨가 추친해야지.”라는 말을 들었다던지

몸이 아파서 결근을 해야 하는 직원은

“그래요, 일단 쉬었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복귀하면 좋겠어요.”

라는 말을 듣고 한참을 서운해했다. 나는 그런 동료들에게 먼저 공감을 해준 다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속상하죠. 그쵸. 근데 생각해보면 직장은 일하려고 모인 곳이지 친목 도모하는 곳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위로는 내 의미 있는 지인들이 진심으로 해주면 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우리 같은 도비들끼리 나누는 거죠. 생각해보면, 관리자가 된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성취욕이 크고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런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아요.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관리자가 갖추어야 할 역량은 맞는데, 일단 집단이 원만하게 운영되는 게 가장 큰 일이고 그게 그 관리자의 최선이니까요.”


  나는 직장과 개인의 나를 구분하면서 업무와 직장에서의 관계에 나만의 선을 대입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거두었다. 이젠 내 업무를 진심을 다해 성실히 해내고 필요하다면 협업을 해내는 것이 직장에서 내게 주어진 최고의 선임을 이해했다. 이 과정에서 내 개인 업무에 충실하고, 협업의 과정에서는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성실하게 내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의 친함이 아니라 직장의 시간과 공간에서 성실하게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직장에서의 신뢰 로운 관계가 되었다. 내게 이런 관계는 각자 성실한 개인들의 의미 있는 관계로, 다른 장르의 관계 맺기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직장에서 가장 적절한 관계로 여겨졌다.      


  직장의 관계에서도 심리적으로 보다 먼 관계와 보다 가까운 관계로 구분이 되기 마련이다. 그 둘의 관계에 따라 대화의 유형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하지만 두 영역의 대화에서 내가 선망하는 역량은 유머이다. 서로 일의 과정이나 끝맺음에서 서로에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면 스몰토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이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유머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화두를 가볍게 핑퐁 할 수 있는 가벼운 유머는 산뜻하게 휘발되며 이 관계과 직장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심리적으로 보다 가까운 관계에서는 직장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공감, 관리자 험담에도, 심리적으로 먼 관계에서 주고받는 관용어구의 대화들에서도 유머는 중요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유머를 섞은 관용어구 몇 개정도 넣어 다니며 종종 써먹곤 하였다.

예를 들면 미혼 시절 나는 이미 대학과 동기중 결혼 안 한 사람 바틈(bottom) 3안에 드는 서른이 넘은 사람이었다. 이때

  “그래서, 주윤 씨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이런 관용어구의 스몰토크가 내게 토스되면 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호주머니에 준비해둔 간단한 관용어구 하나 살짝 집어 말해왔다.

 “내일 해야죠. 오늘은 늦었잖아요.”     


  이렇게 직장에서 업무와 관계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혜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업무와 관계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해왔던 크고 작은 거절은 내가 불편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일에서 힘을 얻고 잘 해내며 좋아하는지에 관한 경험적 증거들이 쌓여갔다. 그래서 점차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생각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내 삶의 선(善)을 위해 일에서의 선(線)을 그어가는 하루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은 까탈스러워지고 호불호를 표현하느라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마흔이 된 지금, 나는 선명해지는 내가 만족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 개쯤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힘들 때, 호주머니에 초콜릿을 까먹듯이 내가 좋아하는 구체적인 일을 내게 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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