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불운한 일일 뿐 불행한 일이 아니다
며칠 전에 이사를 했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조금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그래서 아직 이삿짐도 다 정리하지 못했는데 어느 때보다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제주살이를 시작한 이후 벌써 네 번째 이사를 했고, 어느새 서울에서 자취생활 10년 할 때보다 이사 횟수가 더 많아졌다. 이사의 이유는 그때마다 달랐다. 일 때문이기도 했고, 집주인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후자였다. 이제 이사를 나왔으니 '예전에 살던 동네'가 되어버렸는데, 나는 그 동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주택가였지만 주변에 생활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바다까지 걸어갈 수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대신 도서관이 가까워서 마음의 서재가 풍족해지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동네라면 서울이라도 참 좋겠다 싶었다. 혹시 다시 서울에 간다면 꼭 도서관이 옆에 있는 조용한 주택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렇게 만족도가 높은 동네였지만, 내가 사는 집의 건물주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중국에 산다고 하면서 카톡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어느 날 집에 누수가 생겨 거실로 물이 들어찼다. 카톡으로 연락했더니 마침 제주에 와 있다며 나타났다. 그래 때마침 나타난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싶어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보다시피 거실 안 쪽으로 누수가 생겼는데, 누수탐지 전문가를 불러달라는 말은 귓등으로 듣고 주인이 직접 바닥을 깨부수고 있었다. 뭘 알고 그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결국 나중에는 친구분을 호출해서 급결 방수 처리를 하고 거실 안쪽으로만 물이 들어오지 않게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때 누수의 원인은 그전에 집주인이 수전을 잘못 교체한 탓으로 추정되었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몇 푼 아끼겠다고 손댔다가 더 큰 일을 벌인 샘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보일러 온수 작동에도 문제가 있어 부품을 교체했는데, 집주인은 이 돈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위에 카톡 대화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가장 황당한 대목은 바로 '제주도 문화가 그렇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이런 행태야 말로 제주사람 욕 먹이는 일이다. 내가 아는 제주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제주도에 그런 문화는 없다며 나보다 더 화를 냈다. 게다가 전구 하나 교체하는 것도 아니고 보일러는 임대에 필요한 기초 설비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임대인이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적법하다. 위법을 제주문화로 포장하다니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연세 계약이 만료되면 이사 나갈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이사를 나간다고 통보했을 때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다.
계약서는 본인도 챙겼는데 왜 나한테 올려달라는 건지 그것부터도 못마땅했지만 두 번이나 올려줬고 원하는 임대조건을 얘기해주면 부동산에 집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중국에 있어서 자기가 직접 챙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인 줄 알았다. 나는 어차피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집을 비우고 보증금만 받으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집주인은 내 말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그리고 이사 전날부터는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사를 하면서도 계속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연락두절 상태가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이것은 실화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었다.
이삿날 보증금을 받지 못해 속 끓이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었지, 설마 내 인생에 이런 장면이 불쑥 인서트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가도 겪지 않는 일인데,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까. 속상하고 억울했다.
그런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서 오히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삿날은 처리할 일들도 많고 챙겨야 할 베로나(반려견)도 있어서 나는 그 폭발적인 분노의 에너지로 멘탈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내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나갔다. 분노나 절망, 그것들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 울화가 치밀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고 안정을 찾아갔다.
이삿짐을 한가득 쌓아놓고 한 귀퉁이에 잠자리를 마련해 잠을 청하려고 누웠을 때, 예전에 읽었던 비행운(김애란 작가의 소설집이다)이 생각났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탄식을 내뱉었던 나는 이제 내게 닥친 일들을 소설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허들은 왜 이렇게 높은 걸까?'하는 생각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무엇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으니까 겨우 이깟 일로 내 안의 수많은 행복을 가둬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이 순간에도 내 발치에서 나지막하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베로나를 보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 이것은 단지 '불운'한 일일뿐 '불행'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틀이 지났지만 집주인과는 지금까지도 전화는커녕 카톡 연락도 되지 않고 있다. 이미 한참 전에 계약서까지 카톡으로 보내주었으니 집주인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인터넷뱅킹으로 몇 분이면 해결될 일이다. 그 돈의 액수와 상관없이 이건 명백한 위법이기 때문에 나는 법대로 처리할 생각이다. (집주인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시도했으나 그들은 나와의 전화통화를 원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