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몇 년 전, 아버지는 술을 드시며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결혼하면 일 년에 한 번 친정에 가면 적당하다고 하셨다. 아무리 조선멘탈 아버지의 자식인 유교걸이지만 아버지의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출가외인이고, 친정에 일 년에 한 번이면 족하다는 소리를 하시는 건지...
나는 아버지에게 "그럼 저도 출가외인이 되면 일 년에 한 번만 집에 오면 되겠네요."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눈도 깜짝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의지가 1도 없어 보였다. 그날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결혼하면 아버지말처럼 집에 딱 일 년에 한 번만 와야지'라고 다짐했었다.
결혼준비는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장 어려운 진품명품 감정단을 통과했으니, 이제 결혼식과 서류만 준비하면 끝이다. 아버지는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라, 본인 지인들을 다 초대하여 결혼식을 꼭 해야 한다고 했고, 벨기에에서 날아온 시어머니에게 신랑어머니 측 파란 치마 한복까지 맞춰주시며, 아버지의 지인이 95프로였던 결혼식을 마쳤다.
이제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서류준비가 결혼식 준비보다 더 빡빡했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민으로 벨기에에 이주하는 과정이라 혼인신고서, 출생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번역하고 공증해 내야 했고, 그 서류를 다시 벨기에 대사관에 가져가 벨기에 혼인증명서 신청을 해야 했다.
그리고 벨기에에 가면 시청 외국인과에 약속을 잡고 와플이의의 월급명세서도 내야 했다. 그리고 나면 6개월간의 임시카드가 나온다. 일종의 심사기간인 것이다. 6개월 뒤, 정부에서 배우자거류증을 주지 않을 확률도 꽤 있고, 의심이 가는 경우에는 혼인빙자확인과에서 인터뷰를 요청할 수도 있다.
진품명품 감정단을 통과하니, 또 감정이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한국인은 무비자로 벨기에에 갈 수 있어, 일단 벨기에 도착뒤에 시청에 약속을 잡고 혼인서류를 신청하기로 했다. 벨기에 영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벨기에에서의 생활의 아마 쉽지 않을 거예요. 특히나 당신이 가는 앤트워프의 경우는 더 깐깐할 테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 둬요." 나중에 앤트워프에 도착했을 때 알게 되었다.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브런치북 유교녀 벨기에 생존기 참조)
드디어 정해놓은 출국날이 되었다. 비행기표를 편도로 사니 기분이 이상했다. 얼떨떨하고 어색하고 불안했다.
별로 가져갈 건 없었다. 옷 몇 벌과, 내가 쓰던 컴퓨터, 신발 몇 개... 그리고 나의 새 출발에 친구가 되어 줄 한국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친구... 쿠쿠와 함께 나는 공항으로 출발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공항에 바래다주러 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유일한 내 한국친구 쿠쿠
어머니는 이미 공항을 향해 출발할 때부터 울고 있었고, 공항 게이트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엔 아버지도 눈이 벌겋게 변해있었다. 아버지는 "야 늦겠다. 빨리 들어가. 이제 나 간다. 알아서 들어가라. "라고 게이트 앞 50미터에서부터 벌써 손을 훠이훠이 저으셨다. 무심하게 하는 저 말과는 반대로 딸이 먼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아버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고지식하고 애교 없는 딸은 "도착하면 전화할게요."이 한마디를 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어색하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작별을 했다.
비행기 안에서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하고 온 것이 후회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막상 떠나려 하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새로운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한 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