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Dec 04. 2023

시아버님이 주시는 심부름값

올해 4월에 여든이 되신 시아버님은, 최근 들어 당신의 인지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걱정이 잦아지셨다. 젊었을 때부터 건망증이 심했던 어머님과 달리, 매사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이던 아버님은 내가 느끼기에도 10년 전과 비교해 현재는 운전하시는 게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지셨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집열쇠와 지갑, 가방 같은 것들을 찾아 헤매실 정도로 건망증이 심해지셨다.


무릎이 안 좋아 인공관절 수술을 고려하고 계신 시어머님과 세 차례 어깨 수술을 받으시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게 불가능해 지신 시아버님을 대신해 장을 봐 드리기 시작했다. 두 분이서 며칠에 걸쳐 쇼핑리스트를 작성해 두시면, 나는 그걸 들고 Asda나 Aldi 같은 큰 슈퍼마켓에 가 최대한 싸게 물건을 구입해 드린다. 서로의 집이 5분 거리에 있어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부터 아버님이 심부름값을 챙겨주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질색을 하며 받지 않았다. 딱 영수증에 찍혀있는 돈만 계좌로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한사코 현금을 주시며 잔돈을 챙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잔돈이 아닌, 진짜 심부름값을 얹어 주신다.  


내 부모가 나를 통제하던 수단은 돈,이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이전, 간헐적이고 변동적이며 한계가 없었던 그들의 지원은 나의 소비습관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정신을 차리고 계획적으로 살아보려 애쓰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 한 번 고착된 소비습관을 바꾸는 일에는 정말이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단 걸. 자존감이 낮은 부모가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돈을 쥐락펴락할 때, 거기에 장단을 맞추던 나는 비굴하고 비참해졌다. 말을 잘 들으면 돈을 주고, 마음에 거슬리는 즉시 주었던 모든 것을 회수해 버리는 불안정한 사이클 속에서 나는 그야말로 허우적댔다.


그런 내게 아버님이 주시는 심부름값은 너무나 불편했다. 돈이 곧 통제권, 이라는 공식에 길들여진 내게 반가울 리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시부모님을 보살핀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을 이렇게 훌륭하게, 부족한 파트너를 일으켜 세워가며 사랑과 정성을 쏟도록 길러주신 그들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물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영국으로 건너와 두 달여간 한 집에서 지내야 했던 때, 언쟁이 오가기도 했고 서로 불편함을 참다 폭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를 나온 지 열 달이 넘어가는 지금, 언제 그런 갈등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서로 배려하고 걱정하며 잘 지낸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아들내외에게 혹여 짐이 될까 걱정거리는 최대한 마지막까지 함구하시는 어른들, 우리가 잘 되는 일을 당신들의 일보다 기뻐하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진짜 어른들, 도움을 주시고도 도움을 받는 우리의 마음이 불편할까 더 걱정하시는 좋은 어른들, 그런 분들께 어떤 보답을 드릴 수 있을지, 아니 가능한 일이기나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번 주 목요일에 시부모님을 초대해 저녁을 함께 먹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우리의 초대에  과일, 꽃과 같은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들고 오신다. 마치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시는 기분이 들어 매번 설렌다고 고백하시는 두 분. 내가 며느리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한국 음식을 맛보고 사랑에 빠지셨지만, 한 시간 넘게 운전해 나가지 않는 한 한국식당은 찾아볼 수 없는 시골에 살고 계셔서, 내가 직접 요리해 드릴 때만 한식을 맛보실 수 있다.


고추장양념으로 맛있게 조리한 닭볶음탕을 대접했다. 한국쌀이 제일이지만, 여기서는 구할 수 없으므로 테스코의 스시라이스로 대신해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을 지었다. 오이무침, 숙주나물을 곁들이고 홍합살과 부추(chive), 양파를 넣은 부추전을 바삭하게 구워냈다. 시큼한 초간장에 찍어 부추전을 한입 드신 아버님이, '세상에나, 이렇게 맛있는 팬케익이 있다니' 하신다. 그 순간의 행복과 만족이면 된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다이닝의자가 딱딱해 거실로 일찌감치 자리를 옮기신 어머님과, 아들과 책을 읽기 위해 거실로 따라간 남편이 떠나자 식탁엔 나와 아버님만이 남았다. 디저트로 내 드린 과일을 흐뭇하게 음미하시던 아버님이 마지막 라즈베리를 입에 넣고 포크를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네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풍요롭구나. mum과 나는 이제 체력이 안 돼서 우리가 즐기던 크루즈도 못 가고 국내 여행마저도 힘들게 되었는데, 왜 지금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느껴지는지... 아마도 너희가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좀 더 건강하지 못해 미안해. 그래도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건, 우리가 지금 생의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거야. 우리를 돌보는 게 너희의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아줘서 정말 고맙다. 우리에게도 그 감사함을 표현할 기회를 주렴. 너처럼 재주가 많지 않은 우리는 달리 우리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내 심부름값도 즐겁게 받아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주저 없이 얘기해 주렴. 그건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하는 일일 거야."


경제적으로 독립한 지 이미 25년도 더 남편이, 매달 쓰는 돈보다 저축하는 돈이 많은 짠돌이인 그가, 구두쇠 아버님이 주시는 (20파운드에서 많게는 50파운드)을 마다하지 않고 당연한 듯 주머니에 넣는걸 자주 목격했다. 그 장면을 내게 들킬 때마다 '어, 오'하며 놀란 토끼눈을 하고 뒷걸음질로 도망가는 남편(47세)을 보며 많이 민망했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게 낙이셨다니. 내게도 같이 뻔뻔해질 것을 요청하시다니.


돈이 연관된 진짜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돈으로 표현되는 건 저급한 사랑이야,라며 돈에 대한 결벽증적 사고를 가지고 고상을 떨었던 내게 혼란과도 같은 아버님의 말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님의 진심이 전해진다. 사랑이라고 믿어진다.


11월 초, 아이의 학교에서 타운 내 교회 한 곳을 찾아 추수감사를 위한 합창봉사를 진행하였다. 학부모들도 초대받았는데, 남편이 수업하는 날이라 시부모님을 모시고 참석했다. 합창이 모두 끝나고 교회를 나오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교장선생님께 다가가셨다. '저, 도네이션을 하고 싶은데 누구에게 말씀드리면 될까요?' 그렇게 교회 관계자에게 기부를 하고 나오신 아버님의 표정이 온화하고 행복해 보이신다. 평생 힘들게 모은 돈을 커뮤니티를 위해 기부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시는 그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코끝이 찡해진다.


좋은 어른이 주시는 심부름값이니, 더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거니, 그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전 01화 엄마, 그냥 내가 하면 안 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