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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l 11. 2022

어쩌다보니 사마귀를 키운다

섬의 여름이 깊어지면 몸집을 불린 곤충들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한다. 좋아하는 동물을 상상 속의 공룡에서 실재하는 곤충으로 바꾼 아이들은, 여름을 좋아한다. 언제 어디서든 곤충을 만날  있으니까. 게다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라면 관심은 더욱 커진다. 곤충을 만나는  일상이니까.


섬에서 버티며   있는 이유  하나는 내가 벌레를 그리 무서워하거나 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없었던 낯선 지네나 커다란 산바퀴벌레가 섬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개미나 메뚜기 등에 비해 도무지 적응할  없을 것만 같았던  녀석들도  생활  년차가 되니, 그저 여름이면  만나는  생명체가 되었다.


며칠  수국에 물을 주다 수국꽃 위를 유유히 걸어가는 사마귀를 발견했다. 올해 들어 처음 마주한 녀석이었기에 그냥 놓아주기가 아쉬웠다. 손님이 버리고   깨끗하게 씻어둔 아이스컵을 들고 나가 잽싸게 사마귀를 잡았다.


이렇게 섬에서 살면서 잡은 곤충은 수백 마리가 족히 넘는다. 알락하늘소와 장수풍뎅이를 잡은 적도 있고, 노린재와 섬서구 메뚜기, 공벌레는 수백 마리도 넘게 잡았다. 사마귀는 수십 마리쯤 잡았을까. 지난해에는 난데없이 사마귀가 현관문에 붙어있는  발견해 통에 잡아두고 이삼  아이들과 관찰한 적도 있었다.


남편은 사마귀를 싫어한다. 남편도 벌레를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유독 혐오하는 종류가 있는데 하필 지네, 바퀴벌레 그리고 사마귀다. 때문에 이런 종류가 나오면 잡는   몫이 된다. 남편은 살충제  통을   기세로 뿌려댄  벌레를 잡는다. 살충제는 단지 벌레에게만 나쁜  아니라는 입장인 나는 되도록 살충제를 쓰지 않고 잡으려 한다. 그러다보니 벌레 잡는  더욱  몫이 되어 간다.


남편이 사마귀를 싫어하는 이유는 동족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보통 암컷 사마귀가 짝짓기 중이나 후에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다. 남편의 오해(?)와는 달리 수컷 사마귀는 기꺼이 암컷에게 잡아 먹힌다고 한다. 그렇게 암컷이 영양을 보충하면 자신의 씨가 담긴 알을   낳을  있을 테니까. 그렇게 건강하게 낳은 알에서는 건강한 사마귀가 태어날 테니까.


사마귀도 메뚜기도 모두 불완전변태를 하는 곤충들이다. 알에서 애벌레가 태어나는  아니라, 바로 사마귀나 메뚜기가 태어난다. 봄철 매의 눈으로 풀밭을 뒤지다보면 손톱조각만한 사마귀나 메뚜기가 뛰어다니는    있다. 얼마나 작고 작은지 찾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찾은 곤충들은 너무 작은데도 생김은 어른벌레와 똑같아서 벌레임에도 심하게 귀엽다.


오직 태어난 목적이 유전자 퍼뜨리기인 곤충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 숙연해진다. 하루살이는 살아있는 동안 짝짓기만 하면 되기에 입이 없다. 먹는  포기한 삶인 . 수개미는 짝짓기  곧바로 죽는다. 봄철에는 이렇게 죽은 수개미가 자주 눈에 띈다.


아무리 자신의 유전자가 담긴 자식이라지만,  자식이  자신은 아닌데 그렇게 쉽게 삶을 놓는 곤충들의 생애가  애처롭기도 하다.  애처로운  이렇게 짝짓기에 목숨을 거는 곤충들이지만 실제 짝짓기에 성공하는 수컷은 개체수의 절반에도 한참 못미친다는 . 이런 사실을 알고  뒤부터는 곤충이  다르게 보였다.  


사마귀(나는 이제 너가 좀 무섭다.), 출처-unsplash


잡아둔 사마귀를 보여주자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곤충채집통으로 옮기고는 오래오래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이 싫어할텐데 우선은 아이들 핑계로 기간을 늘려보는 수밖에. 첫째는 녀석의 꼬리부분에 산란관이 있고 크기가 크다며 암컷이라고 말했다. 수컷도  마리 붙잡아 알까지 낳게 하면 좋을  같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아이들은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마귀의 먹이가 될만한 곤충들을 잡았다. 아직은 크기가 작은 메뚜기  마리를 잡았고 사마귀가 있는 곤충채집통으로 옮겨놓았다. 사마귀는 금세 앞다리로 녀석들을 붙잡아 모두 먹어 치웠다.


다음  아침 부엌으로 나와 환기를 위해 창문을  나는 화들짝 놀랐다. 방충망에 사마귀가 붙어 있었던 . 사마귀는 바깥쪽도 아니고 안쪽에 붙어 있었다. 나는 우선 곤충채집통을 살펴 보았다.  안에 전날 잡은 사마귀는 그대로 들어 있었다. 방충망에 붙은 사마귀는  발로 우리집에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재빨리 사마귀를 잡아 곤충채집통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우리집에는  마리의 사마귀가 살게 되었다.


그날 오후 아이들은  사마귀 밥을 찾으러 마당을 뛰어다니다 또다른 사마귀를 발견해 잡았다.  사마귀는 지금까지 잡은   가장 작은 크기였고 유일한 수컷이었다. 아이들은 원했던 수컷이라며  듯이 기뻐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마귀들을  어쩔 것인가. 그렇게 곤충채집통에는   마리의 사마귀와 대여섯 마리의 메뚜기와 귀뚜라미가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일 먼저 잡힌, 가장 큰 녀석이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 우리는 당연히 메뚜기나 귀뚜라미를 잡아 먹고 배를 채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가장 작은 사마귀인 수컷과 사투를 벌이더니 수컷의 허리를 베어 물었다. 그렇게 수컷은 점점 암컷에게 잡아 먹혔다. 잡아 먹히면서도 발버둥치는 수컷을 보면서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아직도 움직여. 이 녀석은 다음날에는 메뚜기와 귀뚜라미도 모조리 잡아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동족인 또 다른 암컷까지 잡아 먹어버렸다. 그렇게 녀석은 곤충채집통에 홀로 남게 되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해서웨이는 이런 말을 한다.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사자가 영양을 잡아 먹는  잔인한 일이 아니라, 육식동물인 사자에게 당연한 선택이다. 이를 두고 약자 편을 들며 사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낼 수는 없는 . 무척 공감이 가는 대사였다. 사마귀도 사자와 마찬가지다


사마귀가 다른 곤충을, 그리고 동족까지 잡아먹는다 해서 내가 비난할 수는 없다. 산란기가 아닌데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곤충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족까지 먹어치우는 사마귀를 보면서 나는 그 잔인함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는 걸 잘 아는데도 그랬다. 아이들은 그런 사마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제도 아이들은 사마귀의 밥이 될만한 곤충들을  잡았지만, 아직 사마귀에게 주지는 않았다. 다른 통에 넣어 두고 관찰하고 있다. 메뚜기  마리는  사이에 허물을 벗고 점점  어른벌레가 되어가는 중이다. 자연에  녀석들을 놓아준다고 한들 이들이 타고난 생을 모두 산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메뚜기든 사마귀든 자연으로 돌려보내고만 싶다. 그렇게 넓은 세상에서 가능성은 낮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마귀를 탓할 수는 없지만 자꾸 녀석을 탓하게 된다. 그렇게  잡아먹어서 결국 좋았는지, 그렇게 힘이  녀석이기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인지, 결국 혼자 남은 기분이 어떤지 묻고만 싶다. 이런  마음도 결국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시선이겠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돌아오면   진지하게 사마귀와 메뚜기를 풀어주는 일에 대해 의논해야겠다. 아이들은 아쉬워하겠지만, 나는 더이상 사마귀가 다른 개체를 잡아먹는 모습을  앞에서 보고 싶지가 않다. 모든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면 인간 사회에서도 약육강식이 통하는  결국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부정할  없다는 증거일까. 인간이지만 인간이기에,  법칙을 거슬러 자비로워질 수는 없을까. 약자도 소수자도 모두 끌어안고, 우리 함께 존재하자고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 사마귀를 놓아주는 문제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의 문제까지도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아이들은 어떤 현답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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