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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5. 2022

살림도 공부(해야)하는 타입

책에 빚진 살림

살림의 기술이 오늘의 나를 돌보고 내일의 나를 도울 거라 믿는다 :)


나는 곰손이다.

스스로 똥손이라고 까지는 하지 말고, 그냥 곰손 정도로 해두자. 그러니까 뭐든지 휙휙, 척척 해내는 야무진 손이 아니다. 뭔가를 놓치고 흘리는 성긴 손. 손으로 잘했던 건 그나마 펜을 쥐고 하는 것뿐이었던 것 같다. 그마저도 손이 아니라 엉덩이 힘이라고 한다면, 손으로 잘하는 건 많지 않다고 봐야겠다.


아이 기저귀 갈기, 세수 시키키, 로션 발라주기, 옷 입히고 신발 신기기 등등 육아 영역의 수많은 '손으로 하는 일'들이 남들보다 더뎌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점점 익숙해졌고 지금은 웬만큼의 속도로는 한다.

 

나는 살림이 좋다.

설거지와 빨래와 청소가 좋은 건 아니다. 양질의 식재료와 건강한 방식으로 조리된 맛있는 음식과 적당하게 정리된 공간, 청결한 옷가지가 좋다. 뭐 일단 먹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나의 가족을 잘 돌보는 내가 좋고, 그런 소소하지만 알찬 일상이 좋다. 때문에 나의 행복의 요소에는 살림이 빠질 수가 없다. 에너지 푸어이면서 손도 느린 내게 살림의 목표는 하나.


“가능한 최소한의 수고를 들이되 그 과정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얻어 낸 성과로 스스로 흡족할 만큼의 일상을 영위하는 것, 세이브한 에너지는 나 자신을 더 잘 돌보는 데 쓰는 것”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건 아래의 두 가지였다.

1) 효율적인 동선, 방식 연구

2) 어느 정도의 손기술 획득


하루아침에는 어렵더라도 칼질 등 손기술을 익혀야만 결과적으로 내가 편해지는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뭐든 손에 익어야만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좀 생기고. 이는 여러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약 2년 동안 살림에 대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바뀌었다. 어쨌거나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에너지는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로 뚫고 들어갔는데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가족은 충분한 영양이 필요했고 자주 외출할 수 없는 시국으로 인해 ‘집 안’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보다 쾌적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 구축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물론 그건 '우리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우리에게 불편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효율적인 동선이나 방식은 경험치가 중요한데, 나의 경험치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었다. 거기다 손이 느려 빠릿빠릿한 살림꾼은 되기 쉽지 않은 타입이다 보니, 그나마 내가 제일 자신 있어하는 '공부'로 살림에 접근해보기로 한 것이다.



대략 위/아래의 책들을 통해 살림에 대한 철학부터 진짜 디테일한 살림 팁까지 배울 수 있었고,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 가면서 나의 일상과 살림에 차근차근 적용해 봤다.


싱크대 배수구를 가장 마지막에 설거지해야 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매일 청소하기('오전의 살림 탐구'에서 배운 내용, 큰 일거리로 만들기보다는 그때그때 개운하게 처리)부터, 여러 정리 책들로부터 얻은 부엌 및 화장실 정리 기술(자주 사용하는 프라이팬은 가스레인지 가까이 두기, 물건 공중 부양시켜 청소 용이하게 하기 등), 팩트에 기반한 실효성 있고 효과적인 절약 방법(초절약 살림법), 건강하고 맛있는 참기름/간장/요거트 고르는 방법, 질 좋은 물건을 구입하고 이를 자주 사용하는 생활 방식, 최소한의 조리로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 등 요긴한 정보들이 많았다. 실제로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물론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우리 소유가 아니기도 하고, 친정/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면서 가정 보육을 하는 상황에서, 집안의 모든 영역을 다 성에 차게 관리할 수는 없다.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나름의 기준을 갖고 관리 중이다.


책에서 알게 된 내용을 적용하며 하나씩 요래조래 해나가다 보니 어느 정도 정돈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집밥 중심의 생활(최근에는 남편 점심 도시락도 매일 챙긴다)도 자리를 잡아간다. 큰 시간은 아니지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점차적으로 확보되고.

책 <칼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물론 이 시간이 확보되는 데에는 나보다 훨씬 야무진 손의 소유자인 남편의 기여도와 배려도 크다. 이런 것들이 두루 합쳐서 세이브되는 에너지들, 그리고 내가 내 손으로 나의 일상을 가꾸고 있다는 좋은 기분이 합쳐져 다시 건강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 책들은 한 번 읽고 끝낸 책들이 아니다. 한창 의욕적으로 하다가 살림이 시들해질 때, 시기마다 눈에 들어오는 책을 가만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고 일상을 차근히 꾸릴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모든 책이 하나하나 고맙다. 책에 빚진 살림.


아마추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하수의 살림이지만 우리 세 식구 세끼 챙겨 먹으며 즈런즈런 사는 일상이 내겐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지금은 가정보육을 하면서 전업주부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이 일상도 얼마간 변화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 체득해 가고 있는 살림의 기술이 오늘의 나를 잘 돌보고, 내일의 나도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구석구석 스스로 흡족한 삶, 아주 오랜만에 나 자신이 조금은 기특한(정확하게는, 기특할 때도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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