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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23. 2022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성장과 금기의 위반

그런 삶의 나이, 서른다섯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JTBC/2018년 3월 방영)'를 몇 년이 지나 아주 늦게나마 정주행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안판석 감독과 김은 작가의 드라마 '봄밤(2019년 5월 방영)'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봄밤'을 서너 번 정주행 했고, 이에 관한 리뷰도 남겼다.


물론 예진 언니는 여름 향기의 말도 안 되는 미친 미모 시절부터 혼자 조용히 흠모했는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 나가는 모습 자체가 참 멋진 배우라고 생각한다(물론 미친 미모도 여전하고).


정해인은 내가 봄밤 과몰입 당시에 푹 빠져있었던 배우라서 이 드라마에서의 연기도 기대가 됐는데, 봄밤의 유지호와 서준희는 완전히 다른 톤의 사람이었다. 두 배우 모두 생활 연기가 무척 자연스러워서 그런지 극 중 인물이 마치 지금 현실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1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이 드라마 특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겨울 분위기 너무 좋다♡


  아무튼 '봄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브런치 참고_봄밤, 신이여 고맙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워낙 핫했던 드라마니까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그때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봄밤'을 보고 나니 안판석 감독과 김은 작가 조합의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 일단 안판석 감독 작품이면 영상과 음악은 내 취향에 맞을 테니 기본적인 눈과 귀호강은 할 수 있을 터, 일단 정주행을 시작해보는 건 큰 손해는 아닌 일이다.


  드라마 '밥누나'의 초반부는 말 그대로 숨도 안 쉬고 봤다. 내가 다 연애하는 기분이어서 나까지 입맛이 없어질 것 같은 그 기분! 발을 동동 구르고 속으로 꺅꺅 거리기도 하고, 혼자 소리 없이 조커 웃음을 지으며 흐뭇하게 봤다. 후반부를 보면서는 숨이 턱턱 막혀 내 몸이 다 아픈 것 같은 느낌. 그만큼 몰입해서 봤고, 김은 작가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 자체의 힘과 안판석 감독의 디테일한 감성은 놀라웠다.


  '밥누나'를 정주하면서 전체적으로 느낀 건 '아 이거 너무.. 이해 간다'였다. 뭐가 이해됐냐면 주인공 '윤진아'의 답답하고 속 터지는 행동들이. 이런 여주인공 캐릭터라면 욕을 꽤 많이 먹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찾아봤더니 역시나 방영 당시 꽤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봄밤'에 비해서 리뷰를 쓰기가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봄밤'은 '밥누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내용이 심플하다.


'밥누나'는 보다 다루기 까다롭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드라마라는 한계 내에서 그려내고 있다. 내가 '봄밤'을 먼저 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밥누나'는 뭐랄까 훨씬 욕심을 낸 작품 같다. 정말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한. '한 인물의 인생의 터닝포인트에 벌어지는 모든 변화의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려고'한 느낌이었다.


  이 드라마는 '윤진아'라는 인물의 한 시기의 삶을 총체적(연애, 부모, 직장, 친구)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이를 한 치의 양보 없이 현실적으로 끌고 간다. 여기서 현실적이라고 하는 건, 이건 사랑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윤진아'의 성장 이야기이고, 그 성장이 말끔하게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마가 끝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목이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인 건 당연히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 드라마가 '예쁜 누나'가 주인공인 이야기,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저러지 싶은 그 언니의 성장 이야기로 보였다. 진짜 사랑을 하게 되고 스스로를 알아가게 되면서 그 언니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그 언니가 환골탈태하여 당당하게만 걸어 나가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속 시원하거나 멋지기보다는 오히려 이제 걸음마를 막 시작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앞으로도 갔다가 뒤로도 갔다가 하며, 이제 좀 잘 걸으려나 했더니 또 넘어지는. 그러나 인생 전체적으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이야기. 그래서 답답하고 씁쓸한 지점들도 있지만 그래서인가.. 난 더 위로를 받았다.

드라마 엔딩 장면. 윤진아는 올해 서른아홉쯤 되었겠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가 그래도 영락없이 판타지인 이유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준희가 그 모든 일들을 겪고서도 그런 결단을 하고 제주로 향했다는 것, 그런 용기와 확신을 갖고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서준희와 윤진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이건 아무래도 정말 판타지 그 자체다.


1. 선을 넘는다는 것 : 금기의 위반

 이 드라마의 1화에서 너무 예쁜 장면이 나온다. 윤진아와 서준희가 드라마 상에서 처음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다. 서준희가 자전거를 타고 윤진아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서로 웃으며 장난치는 씬인데, 함께 이동하면서 윤진아는 자연스럽게 서준희가 있는 쪽으로 선을 넘어간다.


이 '선을 넘는' 연출은 이후에 등장하는 '금기의 위반'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이는데, 드라마 초반에 '금기'와 '위반'에 대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그전에 윤진아의 캐릭터를 잠깐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윤진아는 극 중 35살의 대리급 직원으로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녀가 일하는 방식, 직장 내에서 태도 묘사가 재미있다. 서준희의 표현대로  '알아서 기는' 윤진아는 직장 내에서 싫은 상황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비위를 잘 맞춰 '윤탬버린'으로 불린다.


특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업무 관련 일을 하러 갈 때는 운동화에서 구두로 갈아 신고, 옷도 어느 정도 늘 갖춰 입고 출근하는 윤진아의 모습은 참 공감이 갔다. 나 자신의 모습과도 오버랩되었기 때문. 특히 이런 모습을 비추는 게 눈에 남았던 이유는, 다른 직원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윤진아에 비해 비교적 편하게 입고 출근하는 다른 동료들의 모습들, 싫은 일을 적당히 빠져나가는 동료들과 달리 그런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동반사적으로 웃으며' 붙잡히고 마는 윤진아의 모습은 남일 같지 않았다.  


  이런 윤진아와 이를 알아채는 서준희의 만남은 그래서 흥미롭다. 1화에서 우연히 만난 날 저녁 펍에서 가볍게 한 잔 한 후, 서준희는 윤진아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는 윤진아가 늘 다니던 길이 아니라 '철조망(선)을 넘어서' 가야 하는 다른 쪽 길로 데려간다. 윤진아는 "사는 나도 모르는 건데"라며 신기해한다.


역시 1화에서 둘이 점심때 만나 함께 '밥'을 먹는 장면에서는 서준희가 "와인 한 잔 할래?"라고 묻는다. 윤진아는 살짝 놀라며 "무슨 근무 중에"라며 선을 긋는다. 서준희는 여유 있는 미소로 "금기를 깨야 프로라니까"라며 와인을 주문한다. 식사를 마치고 밥도 와인도 잘 먹었다는 윤진아에게 그가 덧붙이는 한 마디, "맛을 봤으니 윤진아 이제 큰일 났다."


이 말은 어쩌면 뒤에 벌어질 모든 일들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금기를 깨나 가기 시작한 윤진아에게는 앞으로 정말 큰일이 여럿 일어나기 때문이다.


  금기와 관련된 내용은 5화에서도 언급되는데, 경선(준희의 누나)이 업무 관련 1박 일정으로 출장을 간 사이에 진아는 준희네에 몰래 놀러 간다. 아직 경선에게 둘의 연애를 알리지 못한 상태인 진아는 준희네 집에 놀러 간 것에 설레면서도 약간의 불안함 마음을 갖고 이렇게 말한다. "이게 뭐 같냐면.. 어릴 때 집에 부모님 없으면 친구들 불러다 그런 거 하잖아.. 금기시되는 거".


진아와 준희의 연애는 진아에게 그 자체로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가족, 곧 진아의 엄마와 경선(극 중에서 경선이 진아를 친구이자 '딸'처럼 여기는 표현이 두어 차례 등장한다)은 준희와 진아의 연애를 반대, 즉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2. 멀쩡하게 생긴 그 언니의 사정 : 엄마와 장녀

착장도 너무나 예쁘고 이때 연출된 모든 장면들이 사랑스러웠던!

 이 부분을 얘기하면서는 '봄밤'을 언급할 수밖에 없겠다.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비교하며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밤의 이정인을 보면서 느낀 것이 저렇게 내면이 단단해 보이는 캐릭터도 갑자기 찾아온 진짜 사랑 앞에서는 어버버 하게 행동할 수 있구나 였다면, 윤진아를 보면서 느낀 건 아 저 높지 않은 자존감에서 발로 하는 일련의 태도들이 정말 남 얘기 같지가 않네.. 였다.


 일단 두 캐릭터의 첫 번째 공통점은 나이가 35세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갑자기 든 생각인데, 극 중 나이로 80년대생이 주인공인 작품에 대한 리뷰를 주로 쓴 것 같다 크). 예전에 올린 리뷰 '공항 가는 길'의 최수아도 서른여섯이었는데 그즈음이 사랑이든 커리어든 인생에 커다란 터닝포인트, 두 번째 사춘기가 찾아오는 때인 것 같다.


이 시기에 벌어지는 실수의 무게, 선택에 책임져야 할 인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장 생활, 동료들과의 관계가 일상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미혼이라면 연애와 결혼 문제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한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 남자 친구와 뉴페이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극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두 번째 공통점은 부모. 이 두 드라마에서 '가족'은 갈등의 커다란 줄기로 역할한다. 한 인간의 성장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미치는 영향은, 싫든 좋든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진아에게는 엄마가, 이정인에게는 아빠가 빌런이다. 다행히도 윤진아의 아버지는 상식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딸의 편에 서주고, 이정인의 엄마 역시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로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는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빌런'이라는 표현은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 두 부모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자신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데,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라는 명목 하에 자식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고 욕심을 채우고자 한다. 내 자식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귀한 남의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런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이 어떤 점에서 특히 다르게 설정되어 있을까. 윤진아(35세)의 인물 설명에는 "이왕이면 최선을, 좋은 게 좋은 거 주의 탓에 비위 좋게 회사 꼰대들을 상대"하고, "성실한 가장으로 산 아버지, 남편과 자식의 출세를 최우선에 둔 엄마, 범생이 남동생. 그들 속에서 넘치거나 모자람 없는 딱 '평범'자체로 성장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장녀인 윤진아는 아버지, 엄마, 남동생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이왕이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내키지 않을 땐 불편한 소리를 하기보다는 눈치껏 알아서 기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윤진아는 아직 독립하지 않고(드라마 후반부에는 집에서 나오게 된다), 부모님의 집에서 살고 있으며 현관 바로 앞방에서 생활한다.


  반면 봄밤 이정인(35세)의 인물 설명 첫 문장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뒀다. 자매들 간의 애정이 두텁다"이다. 이정인은 세 자매 중 둘째이고 혼자 자취 중이다. 그녀는 윤진아보다는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다. 물리적으로도 떨어져 있고 정신적으로도 훨씬 더 독립적인 상태다. 무엇보다 이정인과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는 장녀 이서인이 있다.


  어떤 면에서 '이서인'은 밥누나의 윤진아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밥누나 후반부에 등장하는 윤진아의 새 남자 친구는 봄밤 이서인의 남편과 같은 배우(이무생)가 연기하는데, 윤진아가 자기의 주관 없이 그저 엄마의 기준에 맞춰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과 적당히 결혼을 했더라면 비슷한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정인은 언니의 실패한 결혼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며 시사점을 얻는다. 그녀는 조건 좋은 전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에게 "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난 언니처럼은 안 살아, 언니 결혼을 보고 더 그런 생각을 굳혔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정인의 엄마는 딸의 선택을 존중하며 딸의 마음을 보듬어준다.


  드라마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한다. 사실 이건 어느 누구의 삶이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장녀의 특성으로 일반화하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장녀가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다만 나의 경험을 통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엄마는 딸을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할 것이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 딸의 자존감을 탈취하고, 정서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특히 윤진아의 엄마처럼 딸을 오로지 자신의 관점과 기준에서 '통제'하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해서라기 보다 '주변 다른 사람들의 시선, 평가'가 '딸의 마음이나 생각'보다 본능적으로 더 중요하고,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오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 시대 엄마의 한계이기도 하다(역시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님들이 그런 건 절대 아닐 테다.).

이 드라마 볼 때 맥주나 와인 등 주류 필수!

   진아가 집안도 좋고 직업도 변호사인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엄마는 '네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러냐, 규민이 같은 애를 네가 어디서 만나냐'류의 잔소리를 빙자한 막말을 쏟아붓는다. 이런 엄마의 정서적 폭력은 윤진아가 왜 윤탬버린으로 불리게 됐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기본적으로 '저자세'로 행동하는 거, 나도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됐었는데 가정에서 - 특히 딸의 경우에 엄마에게 - 어떤 말을 듣고 어떻게 자랐는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아이를 키우며 관련 서적을 읽다 보니 알 수 있게 됐다. 한 인간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부모를 싹 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윤진아가 드라마 후반부에 쫓겨나다시피 집에서 나오고, 그렇게 힘들게 버티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는 전개를 보면서 이런 모녀 관계에서는 물리적 거리가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게 정답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쯤 부모와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으로서 오롯이 살아보는 경험(부모님과 함께 살면서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 성향이라면 다른 얘기겠지만)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상으로는 그랬다. 삼십 대 중반에 어쩔 수 없이 홀로 생활하게 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잘된 일이었다.


  덧붙여 퇴사하고 제주도로 가겠다는 말에 엄마가 윤진아에게 던진 말은 참 현실적이게 느껴졌다. "애가 왜 점점 더 이상해질까"(대사가 정확하지는 않다, 핵심은 '점점 이상해진다'는 맥락). 자아를 찾아가며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부모에게는 갑작스럽고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진짜 '이상'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성장의 과정에는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이다. '나 자신'의 마음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그 선택이 쌓여 '나다운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설령 그 모습이 부모님의 눈에는 흡족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윤진아의 성장은 드라마의 종결과 함께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제야 막 시작된다. 물론 드라마라는 판타지의 세계에서만이라도 깔끔한 성취, 속 시원한 발전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이 추구하는 드라마의 세계는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작년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명랑한 은둔자>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자아의 수리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 혹은 소비주의 문화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암시하는 만큼 깔끔하게 성취되거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다'라는. 대개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도 점진적인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 오히려 홀로 일상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고군분투, 그 진부하고 혹독한 영광에 관한 것이라는.. 너무나 공감 갔던 그 대목이 밥누나의 윤진아를, 그리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희망에 이르는 과정이 갑작스럽거나 극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자아의 - 새로워지고 향상되고 마침내 충만되는 - 수리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 혹은 소비주의 문화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암시하는 만큼 깔끔하게 성취되거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다. 희망은 의지와 끈기와 믿음에 관한 것이고, 대개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점진적인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이며, 사람이 일상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고군분투, 그 진부하고 혹독한 영광에 관한 것이다."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김명남 옮김, 2020, 바다출판사

 

생각해 보면 정작 윤진아는 엄마, 전 남자 친구, 경선이, 직장 내 사건들 등 각종 '관계'에 치이며 순간순간을 살아내느라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깊이 깨닫고 각성하는 장면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최선을 다해 달리던 인생에서 어렵게 잠시 멈춰 선 그녀는 지금쯤은 아마도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보면서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있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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