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도송이 Aug 17. 2024

도서관 흥신소에서 생긴 일

<어르신 의뢰 편> 어제 내가 읽은 책 좀 찾아줘요. 제목은 몰라요.

<흥신소>라는 말을 나무. 위키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의뢰비를 받고 기업이나 개인의 신용, 재산 상태, 개인적인 비행 따위를 몰래 조사해 알려 주는 일을 하는 사설 기관이다. '민간조사업체, 탐정사무소'를 낮잡아서 부르는 건데, 대한민국에서 탐정업은 2020년 8월 5일부터 신용정보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불법이었다. 2020년 8월 탐정업이 합법화됨에 따라 많은 업체들이 관련 자격을 갖추고 기존 흥신소나 심부름센터가 아닌 탐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어느새 흥신소는 어엿한 합법적인 탐정업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당하게 도서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탐정업에 대한 일화를 써보려고 한다. 불륜 채증, 예비 사위 뒷조사 등등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의뢰는 도서관 흥신소에서는 취급하지 않음을 미리 밝힌다. 그것은 도서관에서는 절대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제 읽던 책 좀 찾아줘요"


오늘, 첫 번째 의뢰인을 소개한다. 나이는 80세 이상으로 추정, 허리는 구부정하시나 머리숱은 많으시다. 눈은 부리부리, 가장 큰 특징은 목소리가 우렁차다는 것이다. 도서관 평균 데시벨이 30이라면 우리 의뢰인의 목소리는 100 이상이다.


"내가 어제 읽은 책 못 봤어요? 어제 읽고 여기다 놨는데, 오늘 없네"


그렇다.  오늘 도서관 흥신소에서의 첫 임무는 저 어르신이 어제 읽은 책을 찾아드리는 것이다.


철저한 사전 조사를 위해 인터뷰를 시작한다.

"자, 선생님, 책 이름을 알려주세요"

"영혼은 죽지 않는다"

재빨리 책을 검색한다. 그런 제목은 없다.

"선생님 책 제목이 맞으신가요?"

"영혼은 죽지 않는다" 역시 단호하다.

"선생님 그런 책은 저희 도서관에 없습니다."

"아~솔직히 책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난항이  예고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일단, 5년 차 프로답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영혼', '죽지', '않는다. ' 키워드를 쪼개서 검색해 본다.

웬만한 책은 금세 찾을 수 있는데

이번 건은 세 가지 키워드로 검색되지 않는다.

물론 '영혼'이 들어간 책은 수십 권이지만 '죽지 않는다'와 연관된 제목은 없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이렇게는 찾으실 수가 없어요"

"아, 그게 민영환 얘긴데.... 혹시 민영환 몰라요? 고종 몰라요?."

"아이고, 그분들은 알죠"

"근데, 그 책을 왜 몰라요?"

대한제국 얘기부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시는데,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찾아줄 때까지 가시지 않을 기세다.

나는 민영환, 고종을 키워드로 넣어 또다시 검색해 봐도 연관 책은 검색되지 않는다.

"아니, 옛날에는 잘만 찾아줬었는데, 도서관 직원이 책 하나를 못 찾아줘요?"

으윽, 나를 무능한 직원으로 몰고 가시는데 오기 발동!

내 꼭 찾으리라. 꼭 찾고야 말겠다.


본격적인 현장 검증에 나섰다.

대한제국 관련 책들이 꽂혀있는 911번대 서가로 간다.

통째로 서가를 훑었으나 예상대로 책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믿을 건 포털 검색엔진뿐이다.

오직 단서는 '민영환' 세 글자.

민영환 선생님과 관련 책을 검색하니,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 민영환'이라는 도서가 나온다.

그러나 우리 도서관에는 없다.

고로 실패!

뉴스를 검색한다.

스크롤을 쫙 내려보니

민영환 선생님의 유서가 보인다.

놀랍게도 그 유서의 내용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꽤 비슷한 라임이다. 희망이 보인다. 아무래도 결정적인 증거는 유서에 있는 것 같았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민영환'으로 검색하니

'할배는 죽지 않는다'라는 얼토당토않는 만화책이 뜬다.

어이없게 실패!

'민영환 유서 영혼' '

민영환 유서 죽지 않는다'

'민영환 영혼'

분노의 검색질이 시작한다.

없다. 없다, 없다.

내 영혼이 털릴 지경이다.

진짜 내 영혼까지 갈아 넣는다는 심정으로

'민영환 혼'이라는 키워드를 클릭한다.

그런데 어? 어?

민영환 선생님의 증손녀 민명기 작가가 쓴 '죽지 않는 혼'이

2018년 10월 26일 경향신문에 떡 하니 소개된 것이  아닌가?

과연 우리 도서관에 있을까? 없을까?

'죽지 않은 혼'

청구기호 813.7 -민 34죽

도서상태, 비치 중.


있다. 찾았다. 만세다.

만일 그때 내 손에 태극기가 있었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죽지 않는 혼'을 외치며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죽지 않는 혼을"을 품에 끼고 기세등등한 발걸음으로

의뢰인 어르신의 자리로 갔다.


"선생님, 혹시 이 책이 맞으신가요?"

"네 , 맞아요." 

너무도 차분한 반응이다.

환희에 차 있던 건 나뿐이었다.

마치 '민영환'이라는 결정적인 힌트까지 줬는데

'이제야 찾아왔니?' 하는 표정과 말투에

나는 먹다 남긴 탄산수처럼 밍밍해졌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뿌듯했다. 나의 의뢰인이 반나절을 꼬박 앉아서 독서삼매경빠지셨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토록 찾으셨던 것일까? 이 삼복더위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오게 한 마력은 무엇까? 새삼, '죽지 않은 혼'이라는 책 제목이 저 어르신의 혼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으나 목소리와 정신만은 저리 또렷하시니 말이다. '죽지 않은 혼'이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 정도면 도찐개찐이다.


오늘 나의 도서관 흥신소는 미션 완료다. 나는 내일도 이 탐정업이 도서관에서 흥하기를 빈다.  더 많은 어르신이 독서로 인생의 황혼기에서 더 황홀하시기를.



자, 그럼 다음 의뢰인은?


매거진의 이전글 도서관에서 딸의 마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