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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 진범 Readen Jul 16. 2015

데이터를 대하는 노답 직장인 _ 2편

데이터를 지나치게 믿지 않는 자들의 노답 2가지

지난 1편에서는 데이터를 맹신하는 비극적 이념형에 대해서 얘기했다. 이번에는 데이터를 절대 불신하는 비극적 이념형에 대해서 얘기하려 한다. 이 역시 불신하여 낙관하는 쪽과 불신하여 비관하는 쪽으로 나눌 수 있다. 데이터를 맹신하는 분들은 데이터로 설득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라도 있지만 (물론 실패할 것입니다) 불신하는 분들은 정말 방법이 없다 느껴질 때가 많다. 답답한 얘기 시작해보겠다.


- 데이터를 본 들 어떠하리 안 본 들 어떠하리  (데이터 보는 건 시각낭비! 마이웨이)

내가 생각하기에 데이터가 지닌 가장 큰 한계점은 이것이 현실을 앞설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의 데이터를 가지고 여러 분석 기술을 도입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예측이며 결단코 미래의 변수 모두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데이터를 조합하고 경계하고 통제하여 더 나은 뭔가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제는 일부 직장인에게 있어 전자에 대한 우려가 너무나 깊어 후자에 대한 기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데이터를 쌓고, 분석하고 그 의미를 본다는 것이 일종의 장애물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데이터를 볼 지, 의미를 어떻게 부여할 지, 얼마나 자주 확인해야 할 지 등을 결정하는 건  노력이 많이 든다. 당장 한 발을 내딛여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시간 자체가 부담일 수 있다. 

그럴 때 이들은 너무나 쉽게 데이터를 포기하는 결심을 하곤 한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는 방향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프로덕트의 빠른 생산에 초점이 쏠린 나머지 이들은 다른 모든 길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 길을 간다. 데이터로 돌다리를 두들기는 경우보다 생산의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다. 발생할 수 있는 혹은 발생한 문제도 현장을 중시하는 이들은 쉽게 처리될 수 있는 건으로 여길 것이다. 프로덕트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그들은 믿는다. 이제 프로덕트 생산은 완벽했고 그 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우선 첫 번째 이런 이의 실수는 이 프로덕트가 속도전인지를 가늠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인간의 인지로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무엇인지 살펴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며 세 번째 실수는 프로덕트의 성공마저 가늠할 척도까지 갖추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첫째, 둘째, 셋째도 모두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면 이 마이웨이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객관적은 근거가 데이터일 필요는 없지만 가장 주관을 배제한 근거는 무엇 일까 하면 역시 데이터일 것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업적 역시 근거 없이 부풀릴 것이다. 성공하면 떠벌리고 실패하면 탓하는 뭐 그런 흔한... 경우.. 애초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기를 포기한 이들에게 객관적인 비판 역시 무의미하다. 대처하는 답은 그런 이를 "잊거나, 떠나거나" 뭐 이것 뿐이다. 괜히 노답이겠는가.


- 완벽한 비관주의자

직장 생활하면서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할 때의 이런 사람이 내 앞에 현현할 때 어찌 해야 할까? 답답함을 초월하는 존재 바로 극단적 비관주의자이다. 소위 말하는 에너지뱀파이어이다. 데이터로 무언가를 주장해도 아집에 가득 차서 NO만 외쳐대는 이들, 그렇다고 그들에게 대안이 있는가 하면 있지도 않다.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할 때 매번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야 한다면 무언가를 부정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나름의 객관성과 근거를 갖춘 주장에 NO를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논박의 언어는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책임 있는 분이 그리 되었다면 본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무지의 상태가 되는 것이 빠르다(갑자기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왜 무지해지는지도 알 것 같다). 

데이터나 논리적 기준이 있는 분이라면 말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이제 그 희망마저 꺾였다. 이런 사람 중 몇몇은 자신의 아집을 카리스마 넘치는 위인의 고뇌와 착각한다. 아집과 고뇌의 차이는 무엇을 고민하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걸 말해드리고 싶다. 상대방과의 문제 해결이 목적이라면 고뇌라 하고 자신의 위치 보존이 목적이라면 아집이라 할 만하다. 이런 분을 대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 말고는 드릴 말이 없다. 아니 아이고 어쩌나 하고 통탄하고 싶다. 아이고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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