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철교 아래 하수구 구멍 옆에서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 나야 나
아무리 우리가 사귀자마자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다지만, 정식으로 결혼하자고 말하는 프러포즈는 따로 꼭 필요했다. 이유는 많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꼭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이미 결혼하기로 했는데 프러포즈가 굳이 필요하냐고. 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처럼 물 흐르듯이 결혼이 진행되는 경우라면 더더욱 별도로 필요하다. 결혼은 인생이 바뀌는 하나의 전환점이다. 그렇기에 결혼하기 전에 꼭 한 번은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같이 할 미래의 모습을 다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한창 우리의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부터, C에게 '나는 프러포즈를 꼭 받고 싶다.', '프러포즈를 받기 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했었다. 물론 프러포즈는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C가 해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C는 이제 초조해하고 있었다. 프러포즈를 할 수 있는 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창의적인 프러포즈가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엄청난 이벤트를 바라는 것은 아닌데. 프러포즈를 꼭 받고 싶다고 미리 말했음에도 봄과 여름은 그냥 지나가버렸고, 우리가 혼인 신고를 하기로 한 내 생일, 10월 28일이 코 앞에 남은 10월이었다. 결혼식은 내년이지만 우리는 혼인 신고를 미리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혼인 신고를 해서 법적인 부부가 되었는데 프러포즈를 한다는 건 좀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10월 28일에 혼인 신고를 하고 싶으면, 그전에 꼭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는 일정을 그에게 못 박아두었다.
그는 열심히 색다른 프러포즈를 구상하는 것 같았다. 전에 프러포즈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는 레스토랑 이벤트만은 받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굳이 다이아반지 같은 건 없어도 되며, 핵심은 우리의 결혼에 임하는 너의 생각이라 하였는데, 그는 여기에 얹어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고 싶어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기회는 두 번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날은 10월 24일 토요일, 그다음은 10월 28일이었다. 혼인신고하러 가기 직전에 하려나, 24일이 될 때까지도 그는 아직 프러포즈를 하지 않고 있었다.
24일 토요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평소에 하지 않던 헤어스타일을 하였다. 머리를 말끔히 묶어 올린 것이다. 보통 고무줄 한 번 질끈 묶는데, 그 날따라 앞쪽 머리는 벼머리 스타일로 땋고, 뒤는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그리고 나름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그를 만났다. 낮에는 연희동-홍대 데이트를 하였고, 저녁이 되어갈 무렵, 그가 넌지시 말했다.
저녁은 스테이크 먹으러 가지 않을래?
우리가 가본 곳 중, 가장 가격이 비싼 그 스테이크 집을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불타올랐다.
아니, 집에서 치킨 먹자.
C가 두어 번은 설득한 것 같지만, 왠지 레스토랑은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적극 거부했다. 무슨 날도 아닌데 비싼 레스토랑을 갑자기 가자고 하는 건, 분명 무슨 계획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하며, 뭔지는 모르지만 거기를 가야 하는 계획이라면 난 반댈세 싶어,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의 자취방으로 가서, 치킨을 시켜먹고 배부르다며 배를 통통 거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계획을 저지했으니, 이제 오늘의 프러포즈는 물 건너갔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이 늘어졌다. '다시 기획해서 혼인 신고 하기 직전에 짜잔- 하자. 내가 레스토랑은 정말 싫다고 했잖아.'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배불러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배 부른데, 소화도 시킬 겸, 별 찍으러 나갈까?
음?! 솔깃한 멘트다. 정말 배가 터질 것처럼 불러 이대로 집에 있다가는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아, 나가자는 제안이 반가웠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C는 서울의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일주 사진을 찍기 시작해서, 도시 곳곳 누비며 별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중이었다. 그래, 날도 좋은데 이번에는 같이 사진을 찍으러 나가볼까?
이미 그의 '의미 없는' 계획을 저지했다고 생각한 나는,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촬영 장소는 한강 공원, 주 피사체는 여의도 빌딩들. 한강과 여의도 빌딩을 배경으로 별의 일주 사진을 찍을 계획이었다. 밤에다가 강가니까 좀 춥겠지, 하여 집에 있는 두꺼운 옷들을 꺼냈다. 내가 가진 두꺼운 옷들 중 그의 몸집에 맞을 만한 걸 찾다 보니, 보드복이 나왔다. 그래 두툼하니 괜찮겠네. 그에게 주황색 보드복을 주고, 깔맞춤을 하고자 나는 주황색 등산복을 입었다. 안에 기모 후드까지 몇 겹을 입어 추위에 대비했다.
돗자리와 담요와 마실 물까지. 두어 시간 10월의 밤바람을 맞으며 한강에서 노닥거릴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우리는 출발했다.
이촌동의 한강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짐을 들고 꽤나 걸어서 들어갔다. 여의도 빌딩들이 적절한 각도로 잘 보이는 곳까지. 가로등 불빛과 사람들의 시야를 피해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 바로 앞에 한강물이 넘실 거리는 너른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폈다. 사람이 지나는 길도 아니고, 산책로의 빛도 피할 수 있어 아주 좋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옆에 직경 1미터가 넘는 하수구(?) 구멍이 있고, 위에는 경부선 기차가 지나는 곳이었다.
뭐, 우리의 목적은 사진이니까. C가 테스트 샷을 찍고, 본격 구도를 잡는다. 이렇게 한 번 구도를 정하고 나면 이제 1시간 반~2시간 동안은 계속 카메라는 10초 간격으로 사진만 찍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옆에서 수다 떨며 놀기만 하면 된다.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세로 사진처럼 한눈에 잡히는 한강과 여의도의 빌딩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고요했고, 정기적으로 들리는, 철교 위 기차 지나는 소리는 BGM이 되어 주었다. 소리는 평온하고, 눈 앞은 화려하다. 이 순간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시 속에서 감성이 한껏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창 새로운 느낌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C가 움직이더니 옆에 있는 가방을 뒤적거린다.
첫 번째 선물
하면서 무언가 작은 상자를 꺼낸다. 어?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인데. 상자를 열어보니 목걸이가 있다. 황소자리 상징이 펜던트인 목걸이. C는 황소자리인데, 나를 지켜주겠다는 의미로 황소자리 목걸이를 골랐다고 한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는 내 목에 그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 목걸이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잘 끼고 있다.)
두 번째 선물
책 두 권을 꺼낸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한창 영화 '마션'이 개봉 중이었고, 그 영화를 재밌게 봤기에 원작 책을 샀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신혼 여행을 가기로 한, 칠레 여행기였다. 가기 전에 '칠레'를 느껴보자고 하였다. 내가 먼저 읽고, 이어서 그가 읽을 것이다. 우리는 치열한 고민 끝에 칠레로 신혼여행 장소를 정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나라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세 번째 선물
아니 무슨 선물이 계속 나와? 그는 씨익 웃는다. 아직 끝이 아니란 듯이. 수제 커플 티셔츠가 나왔다. 우리가 사귄 지 1주년을 맞이할 무렵, 내가 '서프라이즈'로 만들어서 그에게 선물해주려고 했던 티셔츠가 있었는데, 내 미적 감각의 한계로 포기했더랬다. PPT에 별자리를 열심히 그려가면서 시도했지만, 영 예쁘지 않아서 포기한 뒤, 이런 슬픈 사연을 그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내 디자인 도안을 가져가더니 이렇게 완성품으로 만들어서 온 것이다! 정말 감격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마음을 담은 편지. 어둠 속에서 휴대폰 불빛을 비춰가며, 그가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쓴 편지를 나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조용한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눈가가 촉촉해질 무렵, 아, 한강철교를 지나는 기차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힌다. 응?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무리 귓가에 대고 읊어도 덜컹덜컹하는 기차 소리를 이겨내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이내 갈 곳을 잃었다. 결국 그는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편지를 읽다가, 기차 소리가 들리면 읽기를 멈추었다. 아, 감격적인 순간에 빵 터졌다. 그전까지 BGM 같았던 기차 소리가 이제는 소음 공해가 되었다. 아니 무슨 기차가 이리 자주 지나간담. 1분에 한 대 꼴로 지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두세 마디 읽다가 멈추고, 읽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며 두 장의 편지를 읽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의 편지는 말 그대로 Proposal이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프러포즈(Propose)는 제안하다는 뜻을 가지고, Proposal은 제안, 기획안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맞춰 그는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위해 달라지려고 하는 본인의 모습을 제안하고 있었다. 제안서는 마지막에 '나랑 결혼해줘.'로 끝났다. 이 남자, 이 결혼을 이렇게 진지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마음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며,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그를 안았다.
그가 프러포즈하기를 기다리며, 나 또한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가 프러포즈하면 답으로 줄 계획으로, 전부터 편지를 써놓았고, 그걸 항상 갖고 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이 때도 그 편지를 갖고 있었고(프러포즈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내 나도 답 편지를 읽었다. 어떠한 마음으로 결혼에 임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또 나는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그렇게 열심히 읽는데 나 또한 기차 소리에 말이 계속 끊겼다. 들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내가 말하는데 끊기니까 엄청 답답했다. 우리는 이렇게 빵 터지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어느덧 1시간 반 이상의 시간이 흘렀고, 밤 11시가 넘어 촬영을 정리했다. 다시 한강 산책로로 올라와, 차로 걸어가는데,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받은 빈 벤치와 강 너머의 야경이 너무 예쁘게 보였다. 바로 C는 나에게 벤치에 앉아보라고 하였다. 왠지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다면서. 그렇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셀카를 찍는 과정. 내가 처음에 카메라 구도 안에 들어와 자세를 잡으면, C가 빈 구도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담요 덮고 가고 있다가, 사진을 찍어야 하니 벤치 위에 담요를 내려놓고 오돌오돌 떠는 장면부터 시작. 담요의 흔적이 보이지만, 이런 것쯤은 잘라내면 된다.
그렇게 사진을 찍었고, 끝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졌다. 볼 때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던 이 사진은, 우리의 청첩장 사진이 되었다. 마침 깔맞춤 한 주황색 상의, 그와 대비되는 푸르고 검은 강과 하늘, 반짝이는 야경,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SAVE THE TIME 사진 한 장.
무엇보다 이 프러포즈가 뜻깊었던 건, 그렇게 한강에서 여의도를 배경으로 찍은 일주 사진으로 그가 천체사진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프러포즈가 일반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 다운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추억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걸 이룬 것도 모자라 상을 타다니, 정말 감격이었다.
제 24회 천체 사진 공모전(2016년) '지구와 우주' 부문 금상 수상
덕분에 대전에 있는 천문연구원에 가서 오찬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그와 이어지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어딘가 곳곳에 천체사진전이 열린다고 하면 가서 보면서 (지인들이 제보해준다) 이렇게 추억을 곱씹는다. 그는 최고의 프러포즈를 하였고, 나에게 있어 이보다 더 완벽한 프러포즈는 없을 것이다. 한강 철교도 하수구도 이 모든 것을 위한 양념일뿐이었다.
추신. 그렇다면 과연 C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던 레스토랑은 무슨 의미였을까? 혹시 플랜 A의 실패로 플랜 B로 선회한 것이냐고 물으니, C는 그냥 프러포즈하기 전에 맛있는 저녁을 먹을까 한 것뿐이었다고 한다. 아... (비싼 저녁을 얻어먹을 기회를 내발로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