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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Feb 15. 2020

엇갈리는 응시, 그럼에도 계속 바라본다는 것

영화 <벌새 House of Hummingbird>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글에 들어간 글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다행히 2020년 2월에도 <벌새>(김보라 감독)를 상영하는 공간이 있었다. 개봉한지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세 번 연달아 봤고, 세 번 모두 눈이 빨개서 나왔다. 다소 늦었지만 <벌새>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벌새>에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시선은 계속해서 엇갈리고, 엇갈리는 시선만큼 은희(박지후)를 둘러싼 관계들도 휘청인다. 사람의 마음은 계절에 따라 변하고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깨지기 쉬울 만큼 연약하다. 남자친구의 연이은 배신,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와 이에 무심한 부모님, 유일한 친구 지숙(박서윤)과의 다툼,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후배 유리(설혜인), 그리고 말도 없이 갑자기 학원을 그만둔 영지 선생님(김새벽)까지. 허망하게 무너진 성수대교 앞에서 영지의 엄마(길해연)가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라고 말한 것처럼, 은희는 자꾸만 잘못된 응답을 보내며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세상에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그 엇갈림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은희는 그저 두 동강 난 성수대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부부 싸움 이후 한참 뒤 소파 밑에서 발견한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아봐 줬던 영지 선생님의 방에서 그 빈자리를 바라보고, 그녀가 남기고 간 편지를 두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영화는 이처럼 끊임없이 카메라로, 그리고 은희의 시선으로 상실의 자리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영화는 은희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응시하는 은희를 통해, 은희와 관객 모두의 시선을 확장한다. 선생님의 부재를 겪고 돌아온 은희는 감자전을 만드는 엄마(이승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돌아가신 외삼촌 안 보고 싶냐”고 묻는다. 내가 이렇게 아픈 만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엄마도 아플 거라는 걸 상상하고 공감하면서, 은희는 비로소 엄마와 연결된다. 그리고 감자전을 열심히 먹는 은희를, 엄마도 영화에서 처음으로 오래도록 바라본다. 하지만 그때 은희는 엄마가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영화 <벌새>

은희는 세상과 자신이 끊임없이 불화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의 간격이 있었을 뿐 은희가 사랑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학기가 지나 마음이 변한 유리는 그 전에 은희를 향한 사랑을 진심으로 표현했었고,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단짝 지숙에게도 알고 보니 지숙만의 사연이 있었다. 수술 때문에 은희에게 안면 마비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그동안 무심했던 아빠(정인기)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갑자기 사라진 영지 선생님의 소포가 은희에게 뒤늦게 도착한 것처럼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들이 은희를 바라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라는 영지 선생님의 물음 앞에서 은희는 자기 속마음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테다. 왜 내 아픈 마음을 안 알아주고, 나를 바라보지 않냐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기에 “넌 네 생각만 한다"는 단짝 친구 지숙 말 앞에서 은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은 영지 선생님과의 이별 다음에야 은희는 자기도 남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된 게 아닐까. ‘나’에서 ‘너’로, 그리고 ‘우리’로 확장되며 타인을 바라보는 은희의 시선 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벌새>는 여타 다른 청소년 성장 영화들보다 성숙하다. 자기를 구속하던 세계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소년의 성장을 담은 <보이후드>(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보다 오히려 상실을 맞이하는 중년여성의 이야기 <다가오는 것들>(미아 한센 러브 감독)을 닮았다.

영화 <벌새>

<벌새>는 집 호수를 잘못 찾아간 은희가 응답하지 않는 엄마에게 문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편지로 남긴 말들을 품은채 한명 한명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본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함께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영지선생님의 편지처럼, 은희는 가닿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보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처럼 일상의 관계도 또 언제 쉽게 부서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계속 움직여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마음에 들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더 나아가 타인의 속마음도 헤아려보는데까지 나아간 은희의 여정은 환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희망으로 다가온다.


2020년 2월

글. 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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