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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l 14. 2020

# 편지 하나 - 첫 만남을 추억하며

노년의 편지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처음 본 그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잊지 않고 살았건만 그대가 그리도 좋아하던 편지 한 장 띄우지 못해 미안하오.  말로 하기엔 남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그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왔던 지난 날들을 회상하며 몇 자 적어보려 하오.  혹 내용이 어수선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읽어주길 바라오.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났던 날은 그대가 나를 처음 만났던 날보다 훨씬 앞서 있었소.  그대가 종종 들리던 그 카페, 책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 단정하면서도 경쾌한 단발머리를 한 쪽으로 살짝 넘겨가며 책을 보고 있었더랬소.  책을 보던 새까만 눈동자가 베이지 색 외투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던지.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도 있었는지 간간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 없이 읊조리곤 했다오.  그럴 때에야 나는 겨우 그대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그대의 신형이 녹아버리기라도 하듯, 아니 그대가 햇빛으로 화해버리기라도 하듯 그렇게 그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변해가기에 나는 그대가 이대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 했었더랬소.  아마도 그대를 붙잡아야겠다는 속마음이 그대를 그렇게 보게 했나보오.       


    그 모습에 반해버린 내가 몇 번이고 말을 건네 볼까 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멀리서 그렇게 바라만 보았더랬소.  한 달 가까이 그렇게 바라만 보다 겨우 용기를 내어 그대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보았는데 어찌나 놀라던지 내가 다 무안했었소.  몇 번이나 나쁜 사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달래보려 했지만 그대의 놀란 두 눈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 듯 하여 아쉬움 가득 안고 뒤로 돌아서려는데 저기요하며 부르는 마치 새벽 마당에 쌓인 눈을 차마 밟고 싶지 않아 겨우 내딛는 발에 뽀드득하며 누가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화답해주는 눈처럼 그대의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천상의 소리는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해 주었다오.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도 맑은지.     


    그렇게 그대가 나를 처음 만난 날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더랬소.  스피커에서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그대로 하여금 내가 하는 말들을 들어보려 상체를 살짝 숙여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고, 그렇게 가까워진 그대와의 거리에 어쩔줄 몰라하며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를 감춰주기도 했다오.  가끔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가 나올 때,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은 노래를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더이다.  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그대가 바로 그 노래가 아닐까싶었소.  계속되는 재미없는 말에도 웃어주고 간간히 답해주는 말들은 그대가 품고 있는 가사 가운데 일부일 것이오.  그 가사에 취해 노래에 취해 한없이 듣고 또 듣고 싶었소.     


    내 평소 재미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대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나는 어느새 입담꾼이 되었소.  하루에도 몇 마디 안하고 지내던 내가 수다꾼이 되었소.  그대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내 모습이 종종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그대의 웃음 한 자락에 어느새 내가 말없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오.  소리 내지 않으려 그 하얀 손으로 작은 입을 가리며 웃는 그대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픈 마음에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곤 했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얇고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소리가 새어나도록 웃어 주었고 그 소리는 나의 귀가 아닌 심장을 옥죄는 사슬이 되어 나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오.       


    공원을 거닐 때면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은 마음 가득했으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손이 부끄러워 차마 잡지 못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허공을 헤매이다 그대의 손에 살짝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했었소.  자판기에서 막 꺼낸 커피를 그대에게 전해주다 손끝이라도 닿을라 치면 그대는 어느새 커피보다 뜨거워진 얼굴을 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고 그 바람에 나조차 뜨거워져 버린 얼굴을 무사히 숨길 수 있었다오.  오늘은 기어코 그대의 손을 잡아보리라 매번 다짐을 하면서도 그대와의 일곱 번째 만남에서야 우연히 곁을 지나가는 자전거로부터 피하게 해주려다 잡게 되었다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었소.  어찌 그리 보드랍고 따스한 손을 가졌는지 그대 심결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오.  그대가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유난히도 목소리가 커져 지나가는 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였다오.  그런데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소.  그 덕분에 그 후로 그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그 자전거 몰던 친구가 너무도 고맙더이다.     


    나 혼자 떠들다 헤어지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대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더랬소.  그대 눈을 바라보면 이내 그 작은 눈에 내가 빨려 들어갔다오.  아마도 그대가 그대 안에 나를 새겨 넣으려 그러했는지 모르겠소.  작고 새까만 맑디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대 마음속에도 내가 있다는 믿음이 생겼소.  그때부터였던 것 같소.  그대가 나의 신앙이 되어 버린 것이.  그대가 어떻게 화답하든 나는 그 믿음을 의지하여 그대 앞에서 때로는 광대가 되어 그대가 웃음 짓길 바랐고 때로는 시인이 되어 그대 마음에 잔잔한 행복의 파동이 일기를 바랐으며 때로는 화가가 되어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며 기도 했었소.  그럴 때마다 그대는 언제나 사람이 어찌 저리 웃을 수 있을까싶은 미소를 짓고는 나를 두 눈에 담고 바라보았소.       


    그것이 내 기도의 응답이었음을 그대는 아는지.  신은 언제나 나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주저하였지만 그대는 언제나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었소.  언제나 말이 없는 신에게 다시 기도했다오.  당신 대신 나의 기도에 답해주는 그대와 늘 함께 있게 해달라고 말이오.  이 번 만큼은 꼭 허락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다오.  신은 그런 내게 지금까지 성실하게 응답해 주고 계시다오.  신을 향한 나의 신앙이 그대로 화하여 존재하고 있음에 나는 신에게 감사 드린다오.     


    신은 사랑이라고들 하더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 생각하오.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이겠나 싶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 존재함을 의심하는 이 아무도 없으니 신이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며 그제서야 신을 향한 신앙의 싹이 트는 것 아니겠소.  사랑하므로 나의 신앙이 되어버린 그대가 있어 신의 존재는 증명되고 기도에 화답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내게 증명해준 신에게 감사 드린다오.  나의 신앙을 신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 말이오.  그대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동시에 신에게 감사 드리는 것이 된다오.  그대 향한 나의 사랑은 곧 신을 향한 찬미라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대를 사랑할 수 있소.  시간이 흐를수록 그대 향한 나의 사랑은 더욱 깊어질 것이며 더욱 진해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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