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 시절 내 꿈은 우유배달부였다. 엄마가 들려준 <플란다스의 개> 스토리에 흠뻑 빠진 뒤, 내린 결정이었다.
소년 네로와 파트라슈라는 멋진 개가 만들어낸 스토리는 당시의 내게 새로운 직업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네로를 따라서 나는 꼬마 예술가로 변신하기도 했는데 돼지 축사를 둘러싼 색 바랜 콘크리트 벽은 온통 나의 도화지가 되곤 했다. 할아버지와 살았던 네로와 달리 내게는 없었던 할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엄마를 조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소환할 수 없었던 엄마와 할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네로가 루밴스의 명화 아래에서 얼어 죽을 때, 그 성당 바닥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짧은 생을 마칠 때, 얼마나 울었던지.
나는 네로보다 가진 것이 더 많았지만 녀석을 많이 부러워했다. 네로에게는 여자 친구 아로아와 파트라슈가 있었으니까. 나는 착하고 이쁜 네로의 여자 친구 아로아는만들지 못해도 파트라슈는 꼭 갖고 싶었다.
우유배달부로 꿈을 정한 후에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윤기 나는 긴 털을 가진 플란다스의 개였다.
마침 집에는 빈 리어카도 있었다. 리어카와 파트라슈만 있으면 누구라도 우유를 준비해 줄 것 같았다. 내 꿈의 실현은 멀지 않아 보였다. 먼저 동네에 있는 개들을 살펴보았지만 앞집, 뒷집, 옆집에 있는 누런 개들은 도무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파트라슈가 되기 위해선 뭔가 흔치 않은 특별함이 필요했다. 우유가 가득 찬 통을 리어카 가득 싣고 내 명령에 따라 수레를 끄는 개는, 역시 파트라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의 월남 치맛자락(1970년대 크게 유행한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알록달록한 무늬의 치마)을 붙잡고 떼를 썼다. 엄마는 조금 지나면 아랫집 복돌이가 새끼를 낳을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우유배달부의 일은 복돌이 새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게는 오직 파트라슈가 필요했다. 며칠 지나면 생각이 바뀔 거라는 엄마의 예상과 달리, 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나의 파트라슈를 갖기 위한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엄마는 멋진, 윤기 나는 털을 가진, 복돌이와는 비교도 안 될, 큰 개에 대한 약속을 했다.
몇 년 같은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나의 파트라슈를 만나는 날이 왔다.
아!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실망이었다. 내 눈앞에는 아주 쪼꼬만 강아지가 수줍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녀석은 리어카를 끌기는커녕 바퀴에 깔려 죽을 것 같은 걱정이 들 만큼 작기만 했다. 실망한 기색이 분명한 내 얼굴을 살피던 엄마는 환한 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유 배달을 잘하기 위해서는 파트라슈가 주인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 그러려면 새끼 때부터 키우며 정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진짜 그럴 것 같았다. 내 계획을 조금만 늦추기로 했다. 그렇게 녀석과 나는 조금 실망하고 큰 기대를 약속하며 처음 만났다.
나는 저 작은 강아지가 언제 플란다스의 개가 될지 조바심이 났다. 녀석은 무조건 빨리 커야 했다. 나는 녀석에게 하루에 다섯 번, 여섯 번 밥을 줬다. 동그란 은색 스테인리스로 만든 밥그릇이 넘치도록 줬다. 녀석의 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지만 녀석도 내 마음을 아는 듯 멈추지 않고 먹고 먹었다. 결국 녀석은 배탈이 났고 며칠을 설사를 하며 끙끙 앓았다. 엄마는 명태 대가리를 삶으면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강아지 설사에 좋다는 민간요법)
녀석은 커지기는커녕 더 작아져버렸다. 핼쑥해진 녀석을 보자 미안했다. 녀석이 며칠 만에 플란다스의 개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순리를 따르기로 했다. 당분간은 녀석과 정을 쌓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매일 아침이 되면 내 키를 재던 담벼락에 강아지의 키를 쟀고 리어카 앞에 녀석을 세워 봤다. 녀석은 앞으로 기울어진 리어카 손잡이에도 닿지 않았다. 리어카는 너무 컸고 녀석은 너무 작기만 했다. 녀석은 느리게 자랐지만 다행히 더는 아프지 않았고 나를 잘 따랐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아! 나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대대 실망이었다. 녀석은 확실히 동네 개들하고는 달랐다.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길고 탐스러운 털이 핵심인데 녀석은 긴 털은 고사하고 온몸에 검은 점이 빼곡히 드러나고 있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뾰족하고 긴 입에 날렵한 네 다리로 그만큼이나 긴 꼬리를 붕붕거렸다. 녀석은 진작부터 파트라슈가 아니었다. 엄마는 포인터 종인 사냥개라고 이실직고했다. 아주 영리하고 멋진 개라고 덧붙였다. 결국 사태를 파악한 나는 짧은 털에 검은 점이 가득한 녀석을 리어카 앞에 세워두고 엉엉 서럽게도 울었다. 산산조각 난 내 꿈을 슬퍼하며.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는 녀석을 나는 자꾸만 밀어냈다. 이후로 엄마는 내게 읽어줄 책을 신중하게 고르는 눈치였다.
녀석에게 심술이 난 나는 일부러 가시덤불에 공을 던지기도 했다. 녀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시 속으로 뛰어들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크고 누런 개가 내게 으르렁거릴 때면 녀석은 내 앞을 딱 가로막고 누런 개에게 흰 송곳니를 번쩍거렸다. 다른 개들은 시도 때도 없이 컹컹 짖었지만 녀석은 침묵해야 할 때 입을 다물었고 동네 아이들이 토끼 사냥을 나가서 빈손으로 고개 숙인 채 산을 내려올 때도 녀석의 입에는 산토끼, 아니 죽은 토끼가 물려있었다. 모습은 플란다스의 개, 파트라슈와 많이 달랐지만 녀석은 그보다 더 충직했고 믿음직했다. 어느덧 녀석은 나의 파트라슈가 되어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아이들이 잘 놀아주지 않을 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준 나의 잭키! 아버지 없는 애라고 동네 아이들이 놀려서 혼자 대나무 밭에 숨어 울고 있을 때, 어떻게 찾아왔는지 달려와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나의 파트라슈!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네 잘못도 아닌데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던 네가 참 그립다. 내 어린 시절 플란다스의 개, 잭키!
뒤늦게나마 네가 내게 와주어서 참 고맙다는 편지를 쓴다. 40년 전, 너와 함께 산을, 까르르 논밭을 뒹굴고, 리어카로 우유배달부를 꿈꾸던 꼬마가, 나의 파트라슈 잭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