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다 못해 질리는 클래식 음악을 연이어 들으며, 확실히 체감한다. 아! 이젠 진짜 끝이구나. 이 듣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마무리라는 걸 실감해서 그런가? 아니면, 점수를 확실히 챙겨야 하는 상황이었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침을 계속 꼴딱 삼키더라.
그래, 방송대로 마음이 편안해야 하는데……. 근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더라? 편해지라고 하니, 오히려 부담이 생기네? 그런데 지금 부담 가지면 진짜 망할 거 같은데? 여유롭게 마음먹고 듣는 애들은 전국 상위 1%쯤 되는 친구들이 아닐까?
이젠 노련하다 못해 버릇된 나머지, 흘러나오는 멘트를 들으면서 곧바로 행동에 착수한다. 성명, 수험번호를 빠르게 쓰고, 혹시나 실수하지 않았는지 걱정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체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이다.
알지. 알아……. 5개 중 하나 고르는 걸 이 순간을 위해 수없이 했는데, 내가 그걸 모르겠어?
그렇게 대학 수학능력 시험, 영어 듣기 평가를 시작했다. 재수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진짜로 마지막이었다.
나의 10대 때 정말로 많이 했던 것, 그건 바로 영어 듣기 평가다. 이른 아침의 수업 시작 전, 고3 시절 수많은 모의고사마다, 혼자 공부할 때 등 끝없이 반복했다. 듣고 풀고 매기고 답안지 확인하고 다시 듣고. 영어 듣기 평가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지옥이었다. 왜냐고? 성인이 되어서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으니깐. 토익, 텝스라는 이름의 친구들을 말하는 거다. 젠장, 고등학교 졸업하면, 듣기 평가와 영원히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죽기 살기로 온몸의 힘을 모으고 또 모아, 하나하나 집중하여, 눈앞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문제를 위해 준비하는 등, 온 정신을 17개의 문제에만 신경 쓰던 2010년 11월의 수능! 그 순간이 문뜩 떠올랐다.
근데 10년도 더 된 수능 영어 듣기 평가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냐고?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 친구 한 명 덕분이다.
청력 검사에서 마주한 이 친구는 헤드폰을 쓰던 때부터 매우 비장하더라. 왼쪽에 소리가 나오도록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친구의 눈에 엄청나게 힘이 들어갔다. 저러다가 눈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와중에,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혔다. 아니, 이렇게까지 열심히 듣는다고……? 혹시 연기는 아니겠지? 아니야. 저렇게까지 영혼을 끌어모아 연기를 하는 거라면, 쟤 영화판에 나가자마자 그해 바로 남우주연상 타 올 거 같은데? 미리 저 친구한테 투자해야 하나? 영화계의 새로운 우량주 발견? 잠깐만, 그것도 있었지? 예능에서 많이 한다는 [고요 속의 외침]! 그거하면 다 맞출 것 같은데? 저 정도의 집중력(?)이면 입 모양만 보고도 그냥 다 때려 맞히겠어! 아마 그 예능 망할지도 몰라……. 심지어, 이 와중에 대사 하나가 내 귓가에 들리는 거 같은데?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니라.
그렇게 온갖 생각이 들던 20분 같던 20초가 흐르고 나서야 손을 들더라. 왼쪽 손을 말이다. 정답! 답을 맞힌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혹시 설마 잘 안 들리나? 그래서 저렇게 집중하는 건가? 아니야. 그러기엔 틀린 게 하나도 없는데? 왼쪽을 세 번 눌러보기도 했고, 이후에 오른쪽 왼쪽 오른쪽을 누르는 등 10번 모두 정확히 따라오는 걸 보면 청력에 문제가 없는 건 분명한데. 1/2을 10번 곱한 1,024분의 1의 확률도 매우 어렵잖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해내는 걸 보면, 설마 그건가?
청력 검사에서조차 초집중해서 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향후 몇 년 뒤엔 수능 영어 듣기 평가 100점이 수두룩하게 넘쳐날 듯하다.
그런데, 얘들아. 이순신 장군님의 각오를 너희가 보여주는 건 좋은데, 여기선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아. 그렇게까지 이 악물고 할 필요는 없어……. 이거 100점 맞추는 시험이 아니거든. 그냥 편하게 듣고 해주면 안 될까? 너희를 보는 나까지 비장미가 넘쳐흐를 거 같아. 옆에 있는 나마저 숨 막히는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네. 고등학생 때 수없이 치르던 영어 듣기 평가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야. 그러니깐, 제발 나 좀 살려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