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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Dec 21. 2021

믿는 토끼에게 손가락 물린다

화창했던 가을날 생애 첫 구급차 시승기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던 어느 가을날 해솔이와 함께 한 목장을 찾았다. 


  귀차니즘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지만, 음머(소)와 양을 보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딸내미의 도돌이표 요구를 더 이상 모른척하기 어려웠다. 


  집에서 약 30분을 달려 도착한 목장, SNS 상에서 유명한 포토존으로 입소문을 타 주말이면 연인들,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붐벼 목장에 동물 구경을 온 건지 사람 구경은 온 건지 혼동될 때가 종종 있지만 아이와 함께 찾은 날은 평일이라 한산해서 좋았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매표를 하고 받은 토끼 먹이(풀)를 컵에 담고 입구 주변에 있는 토끼우리로 향했다. 동물들을 두루 좋아하지만 유독 토끼를 많이 좋아하는 해솔이는 토끼우리에 눌러앉아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분주했다. 받아 온 먹이는 많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흘린 먹이를 고사리 손으로 주워 다시 컵에 담고, 컵에 담긴 풀을 한 가닥씩 손에 쥐고 먹이를 주느라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얼른 올라가서 양도 보고, 소구경도 하고 포토존에서 사진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해솔이에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이야기해 보았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컵에 담긴 먹이,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토끼들에게 건네주고서야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누굴 닮아서 고집이 저렇게 셀까?' 생각하며 잠시 멀리 보이는 양을 바라보다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싸한 느낌이 들었다. 울먹거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옮겼는데, 입고 갔던 붉은색 점퍼보다 손가락 아니, 온 손이 붉게 물들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피로 흥건한 아이의 손을 보고 놀라 다가가 손가락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깊었다. 살짝 베인 정도가 아니라 깊이 들어가서 마치 손가락 첫째 마디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듯한 형상을 보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지체할 수가 없었다. 119에 전화를 하고 안내받은 대로 흐르는 물에 아이의 상처를 씻은 후 지혈을 하며 구급차가 도착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평생 살면서 시간이 이처럼 더디게 흐르는 경험은 처음 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정도 기다렸을까, 구급차가 도착하고 응급처치를 한 후 시내에 있는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놀란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거즈로 감싼 손가락을 꼭 쥐며 이동하는 구급차 속에서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뼈와 신경은 괜찮아야 하는데…, 아이의 작고 예쁜 손에 흉터가 남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평소처럼 그냥 집에 있을걸 왜 뜬금없이 부지런을 떨어서 이런 일을 만들었을까, 아이에게 눈을 떼지 말고 있어야 했는데 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이가 먹이를 계속 주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안고 다른 쪽으로 이동했었어야 했는데… 등등의 자책도 많이 했다. 내가 생각의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해솔이는 지쳤는지 그 흔들리는 차 속에서도 잠이 들었고, 구급차는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실에서 본 아이의 상처는 예상대로 깊었다. 손가락의 1/3 정도 깊이까지 깊게 베인 상처, 세상 순진해 보이는 토끼의 이빨이 이리도 날카로운지,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천만다행으로 피부와 지방층 이상으로 상처가 들어가지는 않아 보였지만 동물에게 물린 상처라 며칠 동안 응급실 진료를 다니면서 살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며칠 사이에 상처는 염증 없이 잘 아물었고 눈에 띄는 흉터도 남지 않았다. 


그만해서 천만다행이다.


  급박했던 그날의 사건을 겪고 난 후에도 아이는 여전히 토끼를 좋아하지만, 가끔 밤에 잠을 자다 말고 토끼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동물들을 보러 가도 예전처럼 토끼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토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손, 깊이 베여 달랑거리는 아이의 손가락을 본, 원래도 안전제일주의를 추구했던 나도 그날 이후 더더욱 아이의 안전에 집착하는 것 같다. 믿었던 토끼에게 손가락을 물린 그날의 사건은 우리 부녀 모두에게 한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육아를 하면서 안전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둘 때가 생각보다 많다.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저번에도 별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시선을 거둘 때 꼭 '무슨 일'이 생긴다. '만에 하나라도…'라는 아이의 안전,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의 안전에 대해서는 절대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손가락의 상처는 나았지만,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아이의 마음의 상처가 얼른 아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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