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이 지난 그 어느날...
“엄마, 그때 그 닭 말이야. 산에 묻어 준 거. 사람들한테 말하면 다들 엄마가 좋은 사람이래.”
“야가, 야가, 뭐라카노.”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어느날 우연히 밥상에서 밝혀졌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땐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았습니다. 종이 상자 안에서 봄 햇살 맞으며 ‘짹짹짹’ 울어대던 노란 병아리는 새학기의 상징이었습니다.
병아리 한 마리를 샀습니다. 애지중지 키웠지만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학교에 다녀오니 죽어 있었고 정말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그 다음 해 다시 병아리를 샀습니다. 이번엔 두 마리 였습니다. 밤낮으로 들여다 봤습니다. 엄마도 병아리가 다시 죽을까봐, 그래서 딸이 죽을 듯이 울어댈까봐 병아리들을 열심히 돌봤던 것 같습니다.
병아리의 노란 솜털은 몸집이 커갈수록 하얀 깃털로 변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마당엔 닭장이 생겼습니다. 엄마 말로는 두 마리 모두 숫닭이어서 새벽마다 울어댔다는 데 기억이 없습니다.
예민한 아빠는 그 울음 소리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는데 알 바 아닙니다. 저는 그저 노란 병아리가 커다란 흰닭이 된 게 신기한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어느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옆집 언니가 뛰어왔습니다. “너희 집 닭들이 죽어간다”는 말에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수돗가엔 나의 ‘흰닭’ 두 마리가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어릴 때 기억이라 많이 사라졌지만 조각으로 남은 몇몇 순간들은 또렷합니다. 닭을 봤고, 엄마를 봤고, 그리고 네모난 나무통을 등에 메고 “칼 갈아요”를 외치던 아저씨가 우리집에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다음 기억은 엄마와 함께 양동이를 들고 뒷산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양동이 안에는 죽은 닭 두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엄마와 산에 묻어 줬습니다. 나무로 십자가도 만들었습니다. 두 손을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저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 곳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다시는 병아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엄마 닭 잡은 이야기’는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분이 됐습니다.
그날 오랜만에 닭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 칭찬을 많이 한다고, 그렇게 아이를 위해 주기 쉽지 않은데 훌륭한 엄마 뒀다고 한다며 엄마를 치켜세워주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던졌습니다.
“야가 뭐라카노. 잘만 묵더만.”
“….”
옆에 있던 동생까지 눈이 동그래 졌습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은 동생이 먼저 깼습니다.
“먹었어? 언니가 그 닭을 먹었다고?”
“무슨 소리야? 누가 먹어. 나, 엄마랑 같이 산에 묻어줬어.”
엄마는 옛 생각이 나는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야야, 말마라. 야가 하도 울어싸서 내 닭을 사왔다 아이가.”
순간 또렷한 두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수돗가에 있던 닭과 양동이에 있는 닭의 모습입니다. 수돗가 닭은 내가 예뻐하던 하얀 깃털도, 붉은 벼슬도, 뾰족한 부리도 그대로 있던 ‘진짜 닭’이었습니다.
반면 양동이에 들어있던 닭은 요리할 때 쓰는 살결이 매끈한 닭이었습니다. 깃털도, 벼슬도, 부리도 없는 ‘닭고기’ 그대로인 닭 말입니다.
엄마의 어떠한 부연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선명한 기억이 모든 것을 말해줬습니다.
두 장면의 닭이 분명 달랐는데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 퍼즐은 맞춰졌지만 말문은 막혀버렸습니다. 엄마는 덤덤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걸 와 산에 묻노. 월매나 정성껏 키웠는디. 그기 유기농 아이가, 유기농. 올개닉이다 안카나. 밥 식는다. 고만 밥 무라.”
그때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억이 진실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세상엔 몰라도 좋을 진실이 가끔은 존재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엄마가 된 지금은 하나 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다는 것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