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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Nov 03. 2017

대영제국은 갔다. 세익스피어는 남았다.

런던 에세이

인류 역사상 불멸하는 수많은 문학가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지고, 읽혀지고, 들려지는 작가는 누구일까? 사후 남겨진 작품들은 끊임없이 영화로 제작되고 또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는 작가는? 매년 학교 연극으로 꾸준히 올려지는 작품의 주인공은?

답: 윌리엄 세익스피어


극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6에 영세를 받았고 1616에 죽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의 이름은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사람중의 하나일게다. 그러나 그에 비견할만한 작가를 대라고 하면 별로 없을것이다. 내노라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세익스피어 작품에 출연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고 또 그의 작품으로 연기를 탄탄히 쌓은 이들도 많다. 영국에선 아예 ‘세익스피어 작품의 연기자’란 이름의 ‘세익스피어리안 배우(Shakespearean actors)’란 단어도 엄연히 있다. 영화와 뮤지컬이 대세인 현재의 문화지도에 가끔씩 세익스피어 작품은 각색되어 영화나 무대에 올려져도 여전히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있다. 누구 누구의 세익스피어 작품이라 하며 서로 비교하기도 한다. 몇년전 ‘맥베스’를 영화로 만들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올랐다든가 또는 배네딕트 컴버바치의 연기로 바비칸에서 올린 ‘햄릿’은 연일 티켓이 동이 났다고 신문에서 난리였다. 심지어 햄릿의 햄릿 역을 한 배우들의 계보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사람들은 왜 세익스피어가 지난 400년 동안 식지않는 인기를 얻고 있는지, 왜 현재도 그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지 원인해석에 분주하다. 혹자는 영어란 언어의 제국주의적 파워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한다. 즉 대영제국과 그 뒤를 이은 영어를 쓰는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뿐 아니라 이로인해 보편언어가 된 영어로 자연히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세계에 알려졌고 사랑받는 이유라고 한다. 맞는 말이고 수긍이 간다. 사람들은 성서 다음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영어의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타이틀을 바꾸며 따뜻한(?) 남쪽 잉글랜드로 내려와 통치한 기간 대대적 성서번역 사업을 했는데 그 결과가 '킹 제임스'역 영어성서다. 아직도 읽혀지는 이 유명한 영어 성서역(최초의 영어 성서는 아니다.)이 유럽 변방의 일개 언어였던 영어를 다듬고 새로운 단어를 정리 창조하면서 오늘날의 현대 영어로 탈바꿈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똑같은 시기에 쓰여진 세익스피어 작품들도 이 성서번역만큼이나 영어 발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하며 학자들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속 단어들이 총 몇개인지 세고 분석하며, 그가 창조한 영어구절들은 아직도 인용구(Quotes)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최근 방송에서는 성서 인용구인지 세익스피어 인용구인지 알아맞히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대부분 헷갈리고 틀렸다. 그만큼 그의 영어에 대한 공헌도를 말해준다.



셰익스피어는 알다시피 지금 그의 이름을 딴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 줄여서 RSC라 한다.)'이 강변에 서있는 스트래트포드 어폰 에이번(Stratford upon Avon)이란 긴 이름의 잉글랜드 중부 워릭셔 타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요즘도 그의 명성으로 인해 이 조그만 타운은 온통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는 어른이 되서 런던으로 진출했다. 당시 테임즈강 북부의 시티(The City)지역과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지역이 런던을 대표했지만 런던 브리지를 건너 테임즈강 남쪽 지역인 서덕(Southwark. ‘사우스워크’가 아닌 ‘서덕’으로 발음)지구도 런던지도에 포함됐다. 그러나 이곳은 세익스피어 당시인 엘리자베스 여왕시대부터 찰스 디킨스의 빅토리아 여왕시대까지 가난하고 범죄가 많은 지역으로 악명높았다. 계급사회였던 영국에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워킹 클래스 지역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때 악명높은 감옥인 크링크 감옥은 지금은 거리이름으로 남아 있고 주위엔 감옥대신 분위기 있는 카페도 여럿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음울한 사회 분위기와 하층민의 삶을 그린 찰스 디킨스는 자연히 이 서덕 지역을 그의 소설 배경으로 많이 등장시켰다. 또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 초오서의 ‘켄터배리 이야기(Canterbury Tales)’의 첫 출발지가 이곳이며 바로 그 출발지점인 세인트 조오지 펍(St. George’s Inn)이 여기에 남아 아직도 술을 팔고 있다. 이곳에 또 성공회의 ‘서덕 대성당(Southwark Cathedral)’이 위치해 있으며 당시 셰익스피어와 그의 가족들이 자주 찾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를 기려 한쪽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의 작품을 배경으로 했다. 또 이 대성당은 미국 하버드 대학을 창시한 존 하버드 목사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성당이다. 성당 안 북쪽에 하버드 채플이 있으며 영국의 하버드 대학 동문들이 기증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런던의 서덕 지구가 셰익스피어와 관계되는 지역이란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곳은 다름 아닌 ‘세익스피어 글로브 극장(Shakespeare Globe Theatre)’이다. 몇년전에 개장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 바로 옆에, 흔들리는 밀레니엄 브릿지가 바로 앞에 보이는 이 셰익스피어 작품 전용 극장은 원래 그의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 그대로 복원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박물관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으며, 운이 좋으면 아카데미 상을 탄 ‘마크 라일란스(Mark Rylance)’가 이 극장 전속배우로 활약하고 있어 그의 세익스피어 작품 연기도 볼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유명세 만큼이나 진짜 그가 그 많은 38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는지, 아니면 다른이의 작품이 그의 것으로 둔갑되었는지는 학자들의 해묵은 논쟁거리이다. 혹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썼다고 하고 서덕 지구 옆 뎊포드(Deptford)의 선술집에서 술취해 칼부림한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가 썼다고 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게 그가 쓴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중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이탈리아 베로나를 그가 한번도 안가봤다는 것이나, 유대인 샤일록의 잔혹성을 보여주어 반유대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자주되는 ‘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인 베니스를 그가 한번도 발디딘적이 없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한번도 가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디테일하게 썼을까? 지금처럼 영화,  tv 그리고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심지어 우리가 알고있는 이마가 훤히 벗겨진 그의 초상화가 실제로 그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몇년간 행적을 알수없는 그가 스페인으로 가서 영국 첩자 노릇도 했다고 하는 루머도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인 ‘아마다’를 물리친 해가 1588년이고 셰익스피어의 행적이 묘연한 시기가 겹쳐 이런 끝없는 상상도 나오는가 보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성서이고 또 영국 역사이니 만큼, 그의 종교도 사실 궁금하다. 그의 시대는 영국이 헨리 8세의 이혼사건으로 성공회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기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특히 성공회와의 알력이 끊임없던 시대이다. 별다른 그의 자서전적 기록들이 없어 학자들은 딱 잘라서 말을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가 성공회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예도 많고 적어도 그는 ‘심정적 가톨릭(Catholic Sympathiser)’이라 하기도 한다. 아직도 운영중인 로마 시내의 영국 가톨릭신학교인 ‘The Venerable English College’의 방문기록에 의하면 라틴어로 그의 이름들인 "Arthurus Stratfordus Wigomniensis" 나 "Gulielmus Clerkue Stratfordiensis" 이 발견되어 이 방문기록으로 보아 세익스피어가 로마를 두번 방문했다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논문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확실한건 사실 아직 없다. 또 햄릿에 등장하는 귀신이 프로테스탄트에는 없는 가톨릭 교리인  ‘연옥(purgatory)’과 함께 나온다. 그래서 그가 가톨릭 신자이었거나 적어도 가톨릭을  두둔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배경인 비텐부르그 대학(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성당이 있던 도시)은 당시 프로테스탄트 지성인의 요람이어서 이 또한 신빙성이 거의 없다. 어쩌면 그의 종교가 성공회였던 가톨릭 동정자였던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시대는 아직 가톨릭의 전례나 풍습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녹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세익스피어는 영국인들의 자존심이고 영어권 사람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일으켜 주는 아이콘이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위대한 셰익스피어는, 그래서 가끔 속좁은 애국주의로 변형될 수도 있다. 인도인들이 들었으면 굉장히 불쾌할 것이다. 잉글랜드와는 다르다고 느끼는 스코틀랜드의  작가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1841년 ‘영웅, 영웅숭배, 그리고 역사의 영웅적인 것에 관해(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Lecture 3)’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람들이 묻는다면, 잘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네 잉글랜드인들은, 인도제국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익스피어를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셰익스피어란 답이 나올까요? 정말 이게 중요한 질문이라면. 의심없이 공직의 사람들은 공식적 투로 답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쪽에서도(스코틀랜드도), 질문에 어떤 강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답변한다고 가정합시다: 인도제국이든 아니든 세익스피어없이 할수 있는 것은 없죠!(Consider now, if they asked us, Will you give up your Indian Empire or your Shakespeare, you English: never have had any Shakespeare? Really it were a grave question. Official persons would answer doubtless in official language: but we, for our part too, should not be forced, to answer: Indian Empire, or no Indian Empire we cannot do without Shakespeare!)


여기서 토마스 카알라일은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식민지 개척 그리고 대영제국이란 틀안에서 작가 특유의 비꼬는(Satire) 투로 정치경제의 파워도 좋지만 결국은 문화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화땜에 대영제국을 일으켰다는 말도 그의 말투속에 언지시 들어있다. 이건 또 어떻게 보면 문화적 열등감의 표현일 게다. 독일어 사용권자들이 괴테를 그렇게 숭앙하는 것처럼.  하여튼, 세익스피어는 강압(Force)으로 지배할 수 있는 정치경제가 아닌 '문화'이며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좁은 땅 잉글랜드를 넘어, 또 정치경제를 넘어서는 보편적인(universal)인 것이라고 작가답게 말한다. 대영제국은 갔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살아 남아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 셰익스피어 작품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는데, 원본 세익스피어 작품집의 머리말을 쓴 ‘벤 존슨(Ben Jonson. 17세기 영국 시인. 주의: 서울 올림픽때 약물 사고친 육상선수 벤 존슨이 아님)이 셰익스피어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를(not of an age, but for all time)”를  관통한다.


무엇일까?

::::

최근엔 그가 묻힌 고향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무덤이 그의 무덤이 아니라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 시인들의 코너에 묻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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