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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25. 2018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오해...

런던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만큼 많이 알려진 영국의 여성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들 그리고 조오지 엘리엇 정도가 알려진 정도이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1월 25일. 하필이면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 로버트 번즈와 같은 날 그녀는 태어났다.


Happy Birthday, Virginia!


그래서 구글(Google)의 첫 페이지엔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여 친근한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를 넣었다. 영국 구글지사 페이지가 아닌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녀의 136년째 생일선물로 구글이 바치는 것이니만큼 이 디지탈 시대에도 힘을 가진  대단한 작가라 생각한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란 '시'로 버지니아 울프란 이름은 자주 기억되고 입에 오르내리지만 정작 그녀의 소설을 끝까지 읽고 재미있었다는 사람은 별로 보질 못했다. 그녀는 모더니즘의 대명사격이고 제임스 조이스와 더불어 의식의 흐름(stream-of-conscious) 서사비법으로 소설작법에 일대혁명을 가져 온 그녀이기에 이런 구글의 생일선물 대접받을 자격은 충분히 있다. 2차대전후 잠시동안 잊혀졌던 그녀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건 70년대 불이 붙은 페미니즘 운동때문이었고 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제 그녀는 페미니즘의 선구자중 한 사람이라는 또다른 멋진 애칭도 얻었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작가이지만 그녀의 소설은 사실 그렇게 재미있질 않다. 혹자는 ‘아, 재미있게 읽었어’하는데 ‘글쎄?’다. 우선 읽기어렵고 거대한 드라마도 없고(‘올란도’빼고) 또 소설의 상황판단이 어려워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들과 많이 다르다. 조오지 엘리엇과 약간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런 류의 대중적인 재미는 없다. 대신, 그녀의 소설분석에 들어가면 무궁무진한 해석들이 튀어나올수 있는 보고이다. 그만큼 파격적이고, 신선하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작가라고 할 수있다. '자기만의 방'을 그녀는 상상력의 공간에 만들었기 때문일까?



대단한만큼 또 그녀에 대한 미화도 많고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으며 그녀의 삶에 대한 과장도 있다. 특히 마지막에 정신병과 자살이라는 그녀의 기구한 삶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 기승을 부린다. 몇달 전 친구가 팟캐스트를 보내왔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관한 것이었다. KBS의 ‘인문학 산책’인가 하는 프로였는데 거기 사회자와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을 소개하려 나온 소설가가, 직접 울프에 관한 책까지 썼다고 하는, 울프가 살았던 영국의 당시 시대상황과 그녀의 선구자적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재미있는 프로였는데 대화 중 한 부분에서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자가 물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학력이 어떻게 되나요?”



답이 똑 부러졌다.


“무학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패는 있고 아주 한국적인 물음과 답이었다. (그 소설가가 답한 무학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학無學은 아닐 것이다. 아라한은 성문의 최후 이상의 세계이므로 여기 이상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다 배웠으므로 다시 더 배울 법이 없어 무학無學이라 한다.) 우선 버지니아 울프는 학위 또는 요즘같은 정식학교과정을 안했기에 무학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영국 여왕도 무학이고 찰스 왕세자의 부인 카밀라도 무학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당연히 울프는 대학 레벨의 교육은 받았다. 그리고 페미니즘 입장에서만 강조해서(약간 과장도 있어) 보기에 여성으로서 마치 대학을 갈 수 없었다는 식(차별)으로 얘기를 끌어가는데 이 말에도 당시의 상황을 모르는 모순이 많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 영국은 남자들도 아주 소수의, 그것도 대부분 상류층만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 잉글랜드엔 새로운 시빅 대학들, 예로들면 브리스톨 대학이나 맨체스터 대학들 등 여러 대학들이 영국 전역에서 고등교육을 한창 넓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새로운 대학들은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와 달리 남녀구분 그리고 종교구분(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영국국교인 성공회를 우선했다. 즉, 성공회가 아닌, 즉 Non-conformists 라면 이 대학들에 갈수 없었다. 지금에야 상상도 할수없지만...)을 없앴다.  물론 그녀가 두 남자 형제들이 캠브리지 대학을 수학했고 자신도 당당히 그런 대학에 가길 원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지금은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옥스브리지(Oxbridge.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를 합친)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영국 상류 귀족층이 가는 이 대학들에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못간 그녀의 울분은 그녀의 책 여러 부분에서 눈치챌 수 있다. (*한편, 그녀는 English 지배 상류층으로 다른 종교들, 즉 가톨릭이나 Non-conformists 교파들이 받는 불이익에는 별 말이 없다. 그녀의 소설에 가끔 아일랜드인과 가톨릭에 대해 나오나 당시 상황을 반영해서인지 부정적인 묘사도 많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영국사회의 아주 소수였던,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영국 최상류 계급에 속했다. 아버지가 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아 경(Sir)의 호칭을 받았을 정도의 집안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녀의 남자  형제들만큼 총명함에도 영국의 중세대학들인 옥스브리지에 못간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경로로 당시에 우후죽순 생겨나던 대학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또 그렇게 했다. 그녀가 결혼 전 살았던 런던 중심부의 블룸즈베리(대영박물관 구역)구역의 집에서 걸어서 몇분안에 갈 수 있던 곳에 '베드포드 칼리지(Bedford College)'가 1849 영국 최초로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됐다. 우리나라 이화여대와 같았던 이 여성대학은 곧 UCL과 킹스 칼리지가 있는 런던대학 연합체에 가입해 런던대학의 학위를 수여했고 한참 뒤에 로얄 홀로웨이란 대학에 합쳐졌다. 그리고 사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 중심부 테임즈강 킹스 칼리지 여성부(the Ladies' Department)에 실제로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다녔다. 거기서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그리고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여성들을 위한 평생교육원과 성격이 비슷한 과정이지만 고등교육과정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지금, 런던의 킹스 칼리지 본관 건물밖에 이 대학 출신의 유명인사들의 대형사진을 붙여 놓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사진도 당당히 거기 걸려있다(위의 사진). 처음엔 나도 의아해했는데 사실이었다. 그리고 2013년엔 이곳에서 가까운  킹스웨이(Kingsway) 거리의 대학건물에 그녀를 기리며 그녀의 이름을 아예 건물이름으로까지 붙였다. 그녀의 여동생이자 화가가 된 바네사 벨도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물론 런던의 킹스 칼리지는 유명한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이 대학에서 공부했음을 알리며 학교 선전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런던의 킹스 칼리지 대학강좌를 들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코스에서 여권신장, 특히 여성고등교육의 선구자들인 릴리안 페이스풀(Lilian Faithfull)를 조우하고 영향도 그녀에게서 많이 받았다. 페이스풀은 당시 스팀보트 여인들(Steamboat ladies)이란 별칭으로 불린 옥스포드나 캠브리지의 여학생들 중 한명이었다. 스팀보트 여인들이란 이 두 중세대학에 수학했지만 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못받는 여학생들이, 대신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의 학위를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받게 된 것을 말하며 당시 더블린으로 가는 이 여학생들이 학위받으러 아이리시 해를 건너며 스팀보트를 탔던데서 유래했다. 남학생이라면 옥스포드나 캠브리지에서 시험을 통과하면 당연히 학위가 주어졌지만 여학생은 스팀보트를 타고 옥스브리지 학위도 아닌 멀리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의 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데도 울프가 살았던 당시는 당연히 있었다. 이 여학생들 숫자는 720명에 달한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같은 당시의 남녀차별에 항의하며 자신의 책 ‘자기만의 방’을 썼고 거기엔 똑똑한 여성이지만 사회 상류층의 지름길인 학위, 특히 옥스브리지 학위없이 여성이 남성이 지배하는 영향력있는 직업군에 진출할 수 없음을 통탄했다. 그렇지만 울프는 킹스 칼리지의 평생교육원 같은데서 대학강좌도 들었고 부유한 집에 또 그리스어를 가정교사에게 배웠다. 후에 “희랍어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On Not Knowing Greek. 1925)”란 에세이도 직접 썼다. 무엇보다도 총명한 그녀가 대학학위를 딸수 있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그녀는 '무학'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은 이런 대학 레벨의 정시교육과정이 아니라 부유한 지식인 집안의 방대한 책들이었다. 그리고 캠브리지를 수학한 남자 형제들과 그들 친구들 방문으로 인한 상당한 수준의 토론과 방담은 정식고등교육보다 더한 교육환경을 그녀에게 조성시켜주었다. 후에 ‘블룸즈베리’의 일원으로 많은 당대의 영향력있던 지식인과 예술인 그리고 작가들을 만났다는 것도 물론 그녀의 지식욕에 대한 연장선이다(몇년 전엔 영국에서 이를 tv 드라마로도 만들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를 ‘무학입니다’로 우리식으로 딱 잘라 말해버리고 마치 그녀가 무학에서 세계적 작가가 되었다는 은 오류이고 미화이며 그녀의 세계와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안된다.



하여튼, ‘자기만의 방’이 출판된 1929년보다 9년전인 1920년에 완고하고 보수적이며 남성위주의 고리타분한 옥스포드 대학이 여성에게도 학위를 주는 것을 드디어 허용하였다. 아마 울프 자신도 9년전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여성교육의 역사를 보면 여권신장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함을 알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처한 당시 상황보다 지금은 말할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도 많을 것이다. 작년에는 그렇게 고리타분하던 옥스포드 대학에 여학생수가 남학생보다 더 많았다고 하며 총장(vice-chancellor)은 또 여성총장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금 살아있어 이 사실을 안다면 놀랄라 크게 기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무학’으로 우리식으로 단정해 버리고 이해해 그녀의 성취를 그것으로 드라마틱하게 장하고 미화시킨다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다시,

Happy Birthday, Virginia!

친구이자 블룸즈베리 일원이었던 화가 로저 프라이의 버지니아 울프 초상화. 1917
남편 레너드 울프와 함께한 버지니아 울프.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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