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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30. 2018

왕은 참수되어 갔지만, 예술은 남았다...

런던 에세이

"썩어 없어질 왕관이 아닌 영원히 부패않는 왕관을 나는 가질것이다. 거긴 아무런 방해도 있을 수없다. I shall go from a corruptible to an incorruptible Crown, where no disturbance can be."


오늘은 1월 30일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아우르는 왕이었던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는 위의 말을 남기며 바로 오늘 1월 30일에 참수를 당하였다. 지금 영국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의 ‘화이트 홀’ 구역에서 임시로 만들어진 형장으로 가기 전 겨울의 런던 날씨는 추웠다. 이미 하루 전 아직 잉글랜드에 있는 그의 두 자녀들에게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의회파와의 전쟁에서 진 왕당파의 무참한 결과는 왕권은 신으로부터 온다는 왕권신수설을 믿었던 그에겐 너무도 허무한 말로였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자존심과 나름대로의 용기 그리고 깍듯한 예의를 마지막 형장에서 까지 지키려 했다. 1월 말의 혹독하게 추운 런던 날씨에 그는 두벌의 셔츠를 특별히 주문해서 입었다. 결코 추운 날씨땜에 곧 죽을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기 위함이 아니었다. 추운 날씨라 자연스레 떨릴 자신의 몸을 형장의 군중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떨리는 몸이 혹시 죽음앞에서의 비겁함으로 군중들이 오해할까봐 겹겹이 셔츠를 껴입은 것이었다. 그의 참수로 영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통치않는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공화정도 문제는 많았고 죄없는 사람들도 죽어갔다. 특히 청교도식 교리를 적용하며 한참 꽃피웠던 영국 르네상스의 종말을 고하였다. 예술은 영혼을 더럽히고 부패시키는, 즉 인간을 쾌락으로 이끄는 도구로 보았다. 일요일엔 어떤 예술적활동을 금하였고 세익스피어가 꽃피운 연극도 검열을 가하였다. 하지만 당시 밀턴같은 공화정을 옹호했던 위대한 시인도 물론 있었다.


허무하게 참수당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파이프 주, 덤펌린에서 태어났다. 에딘버러에서 멀지않은 곳이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왕이자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된 왕이었다. 병약했던 그는 부모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잉글랜드의 왕이되어 내려갔음에도 보호자의 손에 맡겨져 한참을 스코틀랜드에서 길러졌다. 훗날 장성하여 23세가 된 1623년 스페인을 방문하며 유럽대륙의 예술에 눈을 떴고 드디어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결혼한 아내인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공주였고 가톨릭이었던 헨리에타 마리아의 예술적 안목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 작품들뿐 아니라 당대의 바로크 작품들도 엄청 수집했다. 심지어 플랑드르의 루벤스를 초청해 자신의 궁 천장벽화(the Banqueting House)를 그리도록 하였다. 맞다, 그 유명한 바로크의 거장, 앤트워프의 루벤스다. 그리고 자신에게 예술에의 눈을 뜨게 해준 당시 세계 최고 강국 스페인에선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Velázquez)에 의뢰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라파엘로(Rahael), 타치아노(Titian), 코레지오(Correggio), 카라바지오(Caravaggio), 만테냐(Mantegna) 등등의 작품도 닥치는대로 수집했다. 또 그의 예술품 수집은 라틴유럽에만 그친게 아니라 당시 꽃을 피우기 시작한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 나라들(현재의 네들란드와 벨기에)의 화가들, 혼소스트(van Honthorst), 미텐스(Mytens) 그리고 직접 런던의 궁정에서 그림을 그린 반 다익(van Dyck)도 있었다. 아마 반 다익이 그린 그의 초상화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당시 예술에 관한 관심사를 같이 나눈 친한 귀족들인 버킹엄 공작(the Duke of Buckingham)과 아룬델 백작(the Earl of Arundel)과 더불어 ‘화이트 홀 그룹(the Whitehall Group)’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 방문 4년후인 1627에서 1628사이에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만투아의 지배자 만투아 공작(the Duke of Mantua)의 수많은 소장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의 소장품들은 더욱 늘어나 후엔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Bernini)의 작품들과 플랑드르의 재미있는 화가 브뤼헐(Bruegel. 브뤼겔), 르네상스의 절대지존 다빈치(da Vinci), 독일인 화가로 런던에서 그림을 그린 홀바인(Holbein) 등의 작품도 수집했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는 독일의 뒤러도 그렸고 네들란드의 렘브란트도 그렸다.


그러나 이런 예술품 수집의 열정도 그의 참수로 의회파가 집권하자 유럽의 곳곳으로 팔려나갔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도 그의 수집품들이었던 작품들은 걸려있다. 참수당한 비운의 왕이었지만 그의 에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수집한 작품들에 그리고 그가 직접 모델이 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로 남았다. 혹시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시간이 가도 부패않는 영원한 왕관'은 예술을 은유한 것이었을까?


참수당한 왕은 갔지만 예술품은 남았다.


:::

(거의 400년이 흐른 지금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 옵 아트에서 국왕 찰스 1세의 소장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위의 그림:

반 다익(Van Dyck)의 "찰스 1세의 세 모습(Charles I in Three Positions)". 1635-6. 영국 왈실 소유.

그의 아들인 찰스 2세도 왕정복고 뒤에 아버지를 따라 예술품을 수집하였다. 사진은 런던 지하철에 걸린 버킹엄 궁전의 왕실 전시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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