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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21. 2017

산티아고 순례길의 '아베 마리아'

산티아고 순례길 에세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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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먼길을 갈까?

등짝에 진 배낭에는 육체를 위한 생필품외에

'뭘' 또 집어넣어 메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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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빛이 계속 내려쬐었습니다.

쉴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도 길가엔 별로 없었습니다. 헉헉대며 메고 온 10킬로나 되는 배낭의 ‘실 체감무게’는 100킬로나 되는 듯이 느껴졌고 그렇게 25킬로미터를 또 걸었습니다.

오후 2시쯤 해서 가장 뜨거울 시간에 그래도 운좋게 알베르게(호스텔)에 도착해 ‘베드’를 잡고(방을 잡는게 아닌) 무거운 배낭을 침대에 내던져 놓으면 이제 하루 고생한 보람으로 안락한 시간을 보낼 차례입니다. 샤워하고 양말과 속옷을 손빨래로 대충해서 햇빛에 널어놓고 나면 순례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겁니다. 한 오후 5시쯤이면 그렇게 작열하던 스페인의 태양도 고개를 숙일 시간입니다. 이 때쯤에 빨래와 샤워를 마친 '새 몸과 새 마음'으로 순례자들은 한 두명씩 알베르게 공터나 정원에 모여듭니다. 또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산티아고 순례의 정보를 서로 나눕니다. 가끔은 오늘 저녁 순례자 메뉴(Pilgrim’s Menu or Peregrino Menu. 순례자들을 위해 만든 3코스 메뉴)는 어떤 것을 먹을까 묻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지요.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빨래를 다른 순례자들의 빨래 사이에 널어놓고는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 5유로짜리 슬리퍼를 질질 끌며 편안하게 알베르게 정원으로 나왔습니다. 산들바람도 간간히 불어주어 최상의 기분이었죠. 낮 햇빛에 거슬려 술취한 사람처럼 붉그레한 얼굴을 한 대여섯명이 벌써 나와 앉아 두런두런 불어와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가 뒤섞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조인하고 한 30분이 지났을까 대화의 주제가 종교로 넘어갔고 직업은 못 속인다고 난 관심이 갔습니다. 이때다 싶어 각자의 종교를 물어보았는데 생각한대로 대개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무교였죠. 한 덴마크인은 당당히 무신론자라고 얘기했습니다. 건데 맨 마지막 한 65세쯤 되어보이는 신사분이 “난 무슬림입니다” 했습니다. 다들 고개들어 그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영세를 받았지만 성당이나 교회가는데 관심밖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옛날에는 가톨릭 신자들만이 이 산티아고 순례를 개척했고 순례를 했지만 지금은 가톨릭 신자아닌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디톡스(detox)니 힐링(healing)이니 하며 온갖 그럴싸한 이름를 붙이며 이 까미노를 걷습니다.

그 신사분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아 출신이셨는데 독일에서 한 40년을 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알제리 사람이라 프랑스어는 기본이고 독일에 살기에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영어도 자신이 UN에서 일할 때 배운거라 대화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으며 또 아주 '소셜(social)''한 분인 것 같았습니다. 또 이분은 무슬림이 까미노를 걷는다는 이유 하나로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에 관심없는 다른이들에게 갑자기 관심을 유발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어떻게 이슬람 신자가 이 산티아고 순례를 왔는지 묻고 싶어하는 것같았는데 한 프랑스인이 드디어, 어떻게 무슬림으로 이 까미노를 걷는데, 어떤 이유로 또 어떤 기분으로 걷는냐고, 조심스레 물었을땐 다들 귀를 쫑긋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종교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이번엔 아주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알제리 신사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2년전에 저 세상으로 간 사랑하는 그의 독일인 아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처음 결혼할 때 그의 알제리 무슬림인인 가족들이 한사코 말렸었다고 했습니다. 무슬림도 아닌 여자, 그리고 아랍인도 아닌, 종교도 다른 독일 처녀를 보수적인 알제리 가족들은 못마땅해하며 결혼을 극구 반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더 지극했기에 문화, 인종, 종교적 다름을 극복했다고 합니다. 이때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대여섯명이 치는 박수지만 사랑의 지극함과 오묘함에 그리고 위대함에 모두가 동조했고 '모두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같이 참아내고 사랑을 이룬 아내가 암으로 2년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때 그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듯 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숙연해졌지요. 그는 아내가 생전 그렇게 걷고 싶어한 이 산티아고 순례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2년전에는 아직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어 불가능했답니다. 그래서 은퇴한 후 막바로 첫 계획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을 넘는 이 순례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토산토스(Tosantos)라는 암벽을 깎아 만든 아름다운 소성당에서 아르헨티나 성악가 출신의 순례자가 부른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들었을 때 너무 감명받았고 순례중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일주일이 또 지났습니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가 그 전에 만난적 있는 룩셈부르그인인 ‘예잌’을 다시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중에 그는 특별한 경험을 한듯 나에게 말했습니다. “무슬림를 까미노중에 만났어. 세상에 산티아고 순례하는 무슬림은 처음이야.” 그리곤 그는 계속했습니다. “내가 토산토스(Tosantos)의 암벽 성당에서 성악가인 아르헨티나 젊은이가 부르는 아베 마리아를 들었는데 이 조그만 성당안에 울려퍼지는 이 성가는 정말 심금을 울리고 멋있었지. 순례중 최고의 순간이었어. 그리고 가톨릭신자지만 성당에도 안나가는 나에게도 신앙을 일깨우는 것 같은 순간이었어. 한 열명쯤이 성당안에 있었는데 다들 감명 받은 눈치였고 우리 순례자에겐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지.” 그리고 그는 나에게 더욱 가까이 오더니 정작 무슨 비밀을 얘기하듯 낮이 속삭였습니다.

“다들 감명 받았지만 정작 내내 눈물을 흘리며 들은 사람은 그 알제리 무슬림 신자뿐이었어…”

난 그 아르헨티나인이 부르는 '아베 마리아'가 금방 호세 카레라스의 목소리로 변해 귓가에 들려왔습니다. '아, 아베마리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그 은퇴한 알제리인의 흐르는 눈물이 어련거렸습니다. 그는 아베 마리아를 들으며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간 동고동락했던 아내가 얼마나 그웠을까요?

까미노를 걷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금방 헤어지게 되죠. 같은 길을 가지만 어떤이는 걸음이 빨라 빨리 도착지에 도착하고 어떤이는 천천히 걸어 늦지만 순례다운 순례를 한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또 같은 마을이지만 다른 알베르게에 머물수도 있기에 까미노 기간중엔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 계속됩니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가끔 그 전에 만나 얘기했던 순례자를 또다시 순례중 어디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그리운 친구를 만나듯이.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난 뒤엔 항상 낮 12시 정각에 있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Peregrino Misa)를 공동집전했습니다. 이 미사는 순례를 마친 모든 순례자는,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는 순례의 마침표를 찍는 행위이고 또 새출발을 다짐하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큰 산티아고  대성당이 이 미사때는 순례자들로 만원입니다. 나는 이 미사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머문 5일 동안 매일 제의실로 가서 다른 신부님들과 담소하며 미사준비를 했습니다. 또 이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선 그 동안 못봤던 다른 순례자를 만날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제의를 걸치고 다른 신부님들과 미사를 집전하면 순례중 만나고 또 헤어진 많은 사람들이 미사중에 나를 알아보고 미사가 끝나고 다시 만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알제리 무슬림분도 이 미사에 물론 오셨습니다. 다른 분들도 만나 반가웠지만 이 분은 특히 더 반가웠습니다. 인종, 문화, 종교도 다 다르지만 오랜 친구같았지요. 그날 저녁,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나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레스토랑 안과 바깥이 오랜 순례를 끝낸 순례자들로 만원이었습니다. 한쪽에선 기타를 치며 비틀즈의 노래를 합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선선한 저녁바람이 불어주어 우리의 기분을 배가시켜 주었습니다. 다들 즐겁게 저녁을 먹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습니다. 다만 알콜을 입에 대지 않는 알제리 분을 빼고. 우리는 정말 오랜 친구들처럼 스스럼 없었고 까미노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다시 재생 반복하며 산티아고의 아름다운 저녁을 보냈습니다. 이어서 다들 일어날 시간이되자 누군가 내일은 뭐할지를 문득 물었습니다. 어떤이는 집으로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고 몇이는 몇일 더 산티아고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제리인이 얘기했습니다.

“내일은 “땅의 끝(Finisterre. The End of the Land)에 갑니다."

유럽대륙의 최서쪽에 있는 '피니스떼레(Finisterre)'는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한 다음 약 80킬로 서쪽에 있는 이곳 해안촌에 가서 그동안 지고온 배낭의 물품과 순례동안 신었던 신발을 태우는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곤 그가 덧붙인 말은 우릴 모두 놀라게 했습니다. 약 800 km를 걸으며 2년전 죽은 아내의 “재(ash)”를 담은 작은 통을 베낭에 같이 넣어 순례했다고, 그리고 내일 드디어 ‘땅의 끝’ 해안에서 아내의 재를 훌훌 넓은 대서양에 흩뿌릴거라고 했습니다.

우린 다들 말이 없었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내가 생전 못한 이 순례길을 이 무슬림은 아내의 '재'와 함께 800km를 걸었습니다. 아니, 아내의 재가 아닌 아내와 함께 800km  순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곤 동반자 아내를 매일 매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800km를 같이 순례한 아내의 분신인 재를 내일 바다에 뿌릴 것입니다.

우리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우리 각자의 배낭에 뭘 지고왔으며 이 ‘땅의 끝’ 해안에서 뭘 뿌릴 것인가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고생 고생하며 먼길을 지고와선 바다라는 저 '영원'에 아낌없이 내어줘 버리는 행위는 가장 소중한 것을 또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eternity)”을 깨칠수 없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이 소중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버거운(?) 것이 될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소중한 기억과 사랑마저도 미련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기억과 사랑으로부터, 이제 과감히 '영원함'안에 놓아줌으로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건 아닐까요?


('아베 마리아’를 다시 들으며 그 알제리인이 흘렸던 눈물이 떠오릅니다. 약간은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생전 아내가 못한 산티아고 순례를 대신 한 그 알제리 신사분의 아내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그런 아내를 둔게 참으로 행복했던게 아닐까요? 그런 사랑을 받았던, 죽음 뒤에도 기억으로 사랑하는 그런 남편을 둔 그의 독일인 아내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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