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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28. 2017

가을에 읽는 영시

홉킨스-봄과 가을

봄과 가을
              : 어린이에게


슬퍼지지, 마가렛
떨어지는 골든글로브 낙엽을 보니 말이야?
낙엽들은, 인간사처럼,
순수한 어린 너마저 상념토록 만들지,
그렇지?
아,
마음이 늙어갈수록
이런 풍경에 아무 느낌도 없을거야.
숲에 지천으로 낙엽이 쌓여도

한숨 쉴 여유마저 없겠지;
넌 이미 그 비밀을 알아.
비록 네가 어리다 하더라도 말이야:
봄의 슬픔은 똑같은거야.
언어로도, 지성으로도, 어찌 표현할수 없는
마음안에 울리는, 영혼만이 눈치챈,
황량한 인간 그렇게 태어난 운명,
그 속에 있는 널 봤기에 그런거야.
  -제라드 만리 홉킨스 (저의 졸역)

+++
위의 시, ‘봄과 가을’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제라드 만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 신부의 시이다. 그는 예수회 신부였으며 독특한 음악적 운율을 적용한 실험적 시로 또 그의 시를 표현키 위해 여러 새로운 단어까지 창조한 시인이었다. 예를 들어 ‘inscape’라는 말은 ‘landscape(풍경)’에 비교해 인간 내면의 풍경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 시는 어린이인 마가렛에게 시인이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 마가렛은 놀이터인 작은 숲(grove)에서 가을날 금색의 잎(Goldengrove)으로 변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그래서 시작부터 낭만주의가 흐르고 서정성이 묻어난다. 그것을 보고 시인은 자라나는 이런 어린애도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하고(인생과 삶에 대해서) 또 관조하며 슬프하는 것은 인간의 요소(the things of man)에서 드러나는 천부적 인간본성(human nature)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이 나이들고 늙어감에 따라, 또 세상살이에 지쳐 이런 인간본질의 ‘센시티브’함이  무디어져서 이제는 더 큰 숲(세계 또는 우주)에 낙엽이 지천으로 깔리더라도 한숨의 여유(성찰)도 가질수 없는 어른들의 ‘무감각의 상태’를 아프게 지적한다.

다음에 시인은 순수를 잃지 않은 상태의 이 작은 어린아이가 세상만물을 본성적으로 볼수 있는 ‘직관(intuition)’으로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알아챈다고 한다. 이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이전의 인간 즉 프로토-인간(proto-human)을 암시하며 이는 가톨릭 사제인 시인의 신학적 인간학으로 설명이 맞아 들어간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영(spirit)과 육(body)’으로 구성되었기에 ‘mortality(삶의 한계와 죽음)’를 가진 피조물이다. 그래서 숲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인간도 아기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노년기와 죽음에 이르는 피조물로서의 ‘절대 운명’을 피할수 없으며 어린애인 마가렛도 직관적으로 떨어지는 낙엽, 다시말해 피할수 없는 운명인 죽음을 보며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이치를 어린 마가렛이 알아채기에 시인은 가을의 슬픔이 아닌 역설적으로 ‘봄의 슬픔’이라 칭한다. 이것은 언어(입으로)로도 표현할수 없고 또 인간의 이성 또는 지성(mind)으로도 파악할수 없는 종교적 삶의 신비(mystery)이다. 이 신비는 언어도 아니고 인간지성도 아닌 인간 본성, 즉 하느님 모상(Image of God)의 요체인 인간영혼(spirit)으로만 직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애인 마가렛도 ‘떨어지는 낙엽’을 봄으로 ‘인간본성’을 직관하며 결론적으로 떨어지는 낙엽으로 슬픈게 아닌 그 속에 숨은 자기 자신(자아)의 훗날 ‘자화상’을 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이 시가 주는 음울한 풍경과 신학적 의미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운 시를 시인은 의도했을까? 첫째로 이 시의 제목은 ‘봄과 가을: 어린이에게’이다. 봄과 가을은 은유적으로 보면 어린이와 어른이다. 자라날 어린이와 이미 자란 어른이다. 순수한 어린이와 속세의 때가 묻은 어른의 비교대조이며 또 어린 마가렛과 죽어가는 낙엽의 대조이다. 그리고 부제목인 ‘어린이에게(To a young child)’라고 딱히 붙인 사실에서도 어린이를 강조하지만 사실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읽어라는 것이다. 어린애도 알고 느끼는 세상이치(봄에 잎이 돋아나고 가을에 낙엽되어 떨어지는)를 느껴 슬픔을 느끼는데, 이 시 중간에도 나와있듯이, 나이들면서 점차 세상이치를 보는 ‘직관력’을 망각하고  상실해(풍경을 제대로 못보고) 한숨도 짓지 않는(성찰못하는) 순수가 사라진 어른들을 위한 시이다. 여기서 슬픔(sorrow)이나 애도(mourning)는 문자적으로 슬픔이나 애도가 아닌 ‘세상이치의 이해’ 또는  ‘깨달음(enlightenment)’으로 대치시켜도 무방하다. 또한 세상살이에 지쳐서, 아님 속세살이에 너무 빠져, ‘본분’을 잊고사는 사람들에게 봄과 가을, 자라남과 쇠퇴란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초심(back to the root)으로 돌아가자고 일깨우는 지혜의 말도 숨어있다. ‘봄과 가을’이란 두 계절에  드러나는 세상이치(창조주와 피조물)를 이 시를 낭송함으로 다시 창조주 앞에 나의 정확한 위치를 ‘성찰(reflection)’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되었으면 좋겠다.
~
영어 원문:

Margaret, are you grieving
Over Goldengrove unleaving?
Leaves, like the things of man, you
With your fresh thoughts care for, can you?
Ah! as the heart grows older
It will come to such sights colder
By and by, nor spare a sigh
Though worlds of wanwood leafmeal lie;
And yet you will weep know why.
Now no matter, child, the name:
Sorrow’s springs are the same.
Nor mouth had, no nor mind, expressed
What heart heard of, ghost guessed:
It is the blight man was born for,
It is Margaret you mourn for.
-Gerard Manley Hop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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