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타먼더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힘 himi Nov 09. 2020

"Glen한테 작별인사는 했어?"

했겠니   [부드러운 성폭행의 시기-에이섹슈얼의 경우2]

*본문에 등장하는 Deign은 단어 'ring second'에서, Glen은 'Jingle Balls'라는 슬랭에서 따온 가명입니다. 은별은 저의 별명인 '작은 별'에서 가져왔습니다.




지도에는 여기라고 나오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가는 거야? 추워 죽겠는데 짐까지 들고 한참을 서성였다. 다행히 친절한 행인의 도움으로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안녕 은별. 나는 Deign[deɪn]이라고 해. 짐은 이게 전부야?" 이상한 건물의 이상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사람이 말했다. 그는 바퀴가 망가진 내 캐리어를 무심히 들어주며 숙소로 안내했다.


"음... 너는 이 침대를 쓰면 될 것 같네. 미안하지만 짐을 따로 보관할 곳은 없어. 네 물건에 손대지 않을 테니 괜찮다면 여기 두는 걸로 할까? 오늘 계획은 뭐야?"

"잘 모르겠어. 일단 에펠탑으로 가야겠지?"

"아 에펠탑. 따라와 봐."


내가 머문 곳은 한쪽 벽면이 유리창으로 이어진 아파트였는데, Deign이 알려준 대로 유리창에 몸을 반쯤 매달고 고개를 왼쪽으로 꺾으니 저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에펠탑이 보인다.


"와! 멋지다! 진짜 가깝네!"

"그치. 잘 갔다 와. 길 잃지 말고."




그러나 실컷 쏘다니고 숙소로 돌아왔을 땐 Deign도 짐도 없었다. 저 멀리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엔 독특한 억양의 영어가 들렸다. 두 번째 호스트 Glen의 등장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침대를 쓰기로 해 내 짐을 옮겼다는 것 같았다. 아니 저기야 내 짐 안 건드리겠다며...


지금의 으른 은별이라면 약간의 이상함과 짜증을 느꼈을 테지만 그때는 달랐다. 무거웠을 텐데 내가 없는 동안 짐을 옮겨주다니 고마운걸. 여기는 왠지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니야... 그거 아니야... 하지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그러지 않나. 아무리 STAY!!!라고 외쳐봤자 다른 시공간에는 전달이 되지 않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그거 아니라고 해봤자 그때의 은별이에게는 닿지 않는다.


숙소에 도착한 후 내 곁에는 항상 내 것이 아닌 술과 담배가 있었다. 마트에서 1유로에 파는 싸구려 와인과 Glen이 먼저 한 두 모금 빨고는 입에 물려줬던 수제 담배에 나는 묵은지처럼 절여졌다. 피클이 되지 못한 은별 묵은지는 짜증과 기쁨, 열등감과 반가움, 수치스러움과 고마움 사이에서 온 힘을 다해 널뛰곤 지쳐 늘어졌다. 그러면 Glen은 곧 입으로 해주길 요구했다. 질식할 것 같은 그 행위가 싫었지만 걔는 내 머리채를 잡을 때 말고는 대부분 친절했고, 나는 얘가 좋다는데 내가 힘든 건 상관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른이 되면 다들 이러는 건가 했고, 결정적으로 어차피 걔를 피할 곳도 없었다. 걔는 이 숙소의 호스트였고, 내 침대는 걔네 방에 있었으니까. 차라리 입으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후피임약은 한 달에 두 번 이상 먹으면 곤란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를, 부드러운 성폭행의 시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Glen에게 farewell은 했어?"

"아니. 그냥 굿바이만."

"... 그래? 거기도 진짜 좋을 거야. 도착하면 연락해."


짐작했겠지만 Deign과 Glen에게 다시 연락할 일은 없었다.




원래 사용하기로 했던 침대는 내가 그 곳을 떠날 때까지 비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캔 아 키스 유?"-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