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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un 01. 2017

리추얼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큰 잔에 카피를 가득 담아 시작하는 하루.

새벽 5시 30분 안팎으로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커피를 400ml 컵에 가득 채웁니다. 어떤 날은 동쪽 창이 붉게 물드는 걸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새까맣고 건조한 까만 벽을 보면서요. 추우나 더우나 똑같이 되풀이되는, 하루를 시작하는 저만의 의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벽의 조용한 정적에는 마음도 머리도 잔잔한 호수가 되어, K값 #0078 ac 블루 정도의 깊이로 풍덩 빠져듭니다. 사고의 흐름을 깨는 외부 자극이 없어 집중이 잘 되는 시간.


이 시간에 주로 칼럼에 기고할 글을 쓰거나, 제가 좋아하는 브런치에 업데이트할 글을 쓰거나, 신상품을 디자인하거나, 두뇌를 풀가동해야 하는 일들을 해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에는 그저 책을 읽는데, 700~800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는 효율이 나오기도 합니다.

https://www.instagram.com/p/BL69pX6hxd0/?taken-by=jaekyung.jeong

 6시 30분부터 7시까지는 200여 개의 화분에 스프레이해 주고, 시든 잎을 제거해 준다거나 벌레를 잡아주는 등 화분 관리를 하고, 그리고는 7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아침 운동을 하고, 씻고, 7시 50분이 되면 아침을 준비하고, 식구들과 같이 아침을 먹고는 얼른 정리하고요. 그리고는 공식적인 일과를 시작합니다. 저는 이걸 컨디션 조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행위들이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리추얼(ritual)이라고 표현하는 책을 만났어요.


이제 나이가 가볍지만은 않아서 컨디션을 유지에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큰 업적을 남기신 작가님들도 일상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그저 '사람'이었어요. 좌절하며 흔들리며 현실을 넘어 지적 탐구를 계속해 나가는 161명의 지성들께서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이 담긴 책을 보며, 한편으로는 경건해지기도 해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활동하는 내내 보통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살인적인 시간표를 지켰다고 하고, 무라카미 류는 아직도 새벽 4시에 기상, 휴식 없이 대여섯 시간을 일하고 오후에는 운동, 저녁 9시에 잠드는 의식을 지킨다고 해요. 미국의 현대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트와일라 타프는 빡빡한 시간표 때문에"분명 비사교적인 삶이다"라고 말했지만 "창조적 수준을 높이는 데는 유리한 삶이다"하셨지요. '리추얼 (메이슨커리, 강주헌 옮김, 책 읽는 수요일, 2014)'


미국의 시인 소설가, 가수, 극작가, 배우, 프로듀서,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던 르네상스적 인물인 마야 안젤루는 "내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란 걸 인정하지만, 그런 성향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셨다고 해요. 이 책을 통틀어 제게 가장 큰 영감을 주신 분이에요. 이렇게 훌륭한 분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그런데요, 우리네와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분들은 다르긴 달라요. 프리 챗은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공부하고 연구했다. 1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을 낙담하게 만드는 근면함이다." 1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일상이라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저는 가끔 늦잠을 자기도 하는데... 흑.


원래도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작년 가을부터 독서량을 많이 늘리기 시작했어요. 머리가 텅 비워져 그런 건지 마음이 메말라 그런 건지 책 속 문장 하나하나가 다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많이 읽다 보니까 인용된 책들 중 구미에 당기는 제목을 만날 때마다 다 읽어 치우고 싶은, 뒤늦은 학구열에 불타는 요즘이에요.


읽고 싶은 책을 잊지 않고 보기 위한 저만의 팁이라면, 보고 싶은 책이 나타날 때마다 바로바로 도서관 어플로 신청을 해 두는 거예요. 상호대차를 신청하거나 예약을 해 둔 책이 도착했을 때마다 도서관에서는 문자를 보내주셔요. 그것도 약속이라 꼭 챙기게 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 같습니다. 기왕 머리를 쓰는 김에, 영어책도 외우기 시작했고, 중국어 책도 외우기 시작했어요. 일 년쯤 지나면 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니 기대해 봅니다. :)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을 내기 위해서는 뭐든 한 번에 잘 하도록 끊임없이 숙련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달걀 프라이도 예쁘게 터지지 않게 해야 식구들이 먹기 편하고, 그래야 식탁 위에 깨끗한 접시가 남고, 정리도 편하고, 설거지도 쉬워집니다. 달걀 프라이가 터져버리면, 식구들이 먹으며 식탁 위에 흘릴 가능성이 높고, 식탁도 닦아야 하고, 노른자가 흘러버린 접시는 물과 세제와 시간을 더 많이 써 씻어야 하지요. 어떤 일을 만나도 힘들어하지 않고 쓱쓱쓱 해 치워버리는 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좋은 머리와 큰 경험치와 부지런한 일상을 갖고 있는 걸까요.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좋아하던,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저는 '리추얼 (메이슨커리, 강주헌 옮김, 책 읽는 수요일, 2014)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앞에 줄줄줄 말씀드렸어요. :)

 

http://m.yes24.com/Goods/Detail/85121544?pid=157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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