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카 45
박완서 '나의 만년필'을 읽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노라노 선생님께서는 아흔이 넘은 지금도 다섯 세기 전에 일어나신다는데...하면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지 않는다.
내가 글 쓰는 공간에는 400mm*750mm 짜리 낮은 책장과 1400*7500mm짜리 작은 사무용 책상이 있다. 책상 앞에는 딱딱하고 작은 사무용 의자가 있다. 빨간색이고, 바퀴가 달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책상이 작아 방심하면 금세 각종 자료들로 뒤덮이지만, 한편으로는 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작은 책상 위에서 아침마다 두툼한 대학노트를 꺼내 모닝페이지를 쓴다. 그러려면 키보드를 세우거나 옆으로 치워야 한다. 그러면 겨우 노트를 펴 놓을 공간이 생긴다.
책상 왼쪽 낮은 책꽂이에는 내가 또 읽고 싶은 책이나, 자꾸 읽고 싶은 책들을 나란히 꽂아 두었고, 왼쪽 책장에는 각종 기록물을 세워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군더더기들을 많이 버렸다. 무작정 책장에 꽂아두었던 서류들는 걷어내 모두 정리했고, 서랍마다 채워진 잡동사니를 단호하게 버렸으며, 자주 들춰보지 않는 잡지나 책은 자리를 옮겼다.
이 자그마한 책상 위에서 나는 가장 자유롭다고 느낀다. 딱딱한 빨간 의자에 앉아 소음이 나지 않는 전기 난로를 켜고, 동이 터오는 고요한 새벽, 만년필이 노트 위를 지나가는 서거걱하는 소리만 들리는 내 공간. 딱딱한 의자는 허리를 곧추 세워 머리에서 손까지 직행하는 지름길을 만들어 준다. 500ml의 물을 끓여 CALIFORNIA라고 적혀 있는 컵에 물을 가득 채우고, 여기까지 글을 쓰면 커피가 딱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된다.
매일 아침 책상에 앉아 모닝페이지를 쓰는 대학노트는 500매 짜리다. 노트를 펼치며, 만년필 중 하나를 고른다. 이 때의 나는 갑옷을 고르는 장수처럼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TWEMCO의 엔트리 모델인 페르케오 만년필을 좋아한다. 손의 각도와 만년필의 각도가 제일 잘 맞고, 가볍고, 펜촉을 타고 넉넉하게 흐르는 잉크가 마음에 든다. 내겐 만년필이 마법의 지팡이인 셈이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글을 쓰셨다는 박완서 선생님은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도 옷도 만들어 입히고, 밤새 연탄불을 갈아가면서도 이불에 풀을 먹여 시침질해 호청을 바꾸시는 대단한 생산성을 가진 생활인이기도 하셨다. 얼마나 바지런하고 똑똑하신 분이면 그 와중에도 거의 매해 책을 쓸 수가 있단 말인가.어떻게 일분 일초마저도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걸까.
박완서 선생님의 방에는 빨간 색 둥근 소반 위에 항상 원고지와 파카 45 만년필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다. 나중에는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셨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파카 45'라는 단어가 들어온다. 내 사고의 걸음 속도는 만년필로 기록하는 속도와 비슷하다. 파카 45 만년필로 글을 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남편의 책상 위에서 남색 바디에 스테인레스 뚜껑을 가진 파카 45와 아빠의 장롱에서 와인색 바디에 금색 화살 모양 클립을 가진 파카 45를 찾아, 내 만년필 트레이에 더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파카 45 만년필에는 잉크가 말라 붙어 있다. 커피물에 담가 펜촉을 불렸다. 컨버터로 물을 머금었다가 뿜기를 여러 번. 다행히 만년필에는 다시 잉크가 흐르기 시작한다. 만년필을 손에 쥘 때마다 머리와 마음과 손이 시속 110km로 통행하는 고속도로가 뚫리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꿈에 가깝다. 글감은 비눗방울처럼 하늘을 잠깐 날다 터져버리고, 파도처럼 밀려 왔다 하얀 방울로 사라진다.
이 생각들을 붙들어 매,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따라 읽다 보면, 40대에 등단하시고 80대까지 꾸준히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이지만 그래도 물 쓰듯 펑펑 써 버린 지난 날들이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하루하루 완전 연소하듯 보내야지. 나중에 할머니가 되었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다. 박완서 선생님의 '나의 만년필'이 남겨주신 선물이다.
